23 철학 이론

블로흐: 칸트와 물질 (3)

필자 (匹子) 2022. 3. 12. 15:23

(계속 이어집니다.)

 

칸트가 기계주의 물질 이론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실천 이성의 요청” 그리고 ”판단력이 작용하는 규제적 이념“이 현실성의 지형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칸트는 자신의 첫 번째 순수 이성 비판에서 무엇보다도 수학이라는 자연과학의 척도에 따라 현실을 엄밀하게 측정하려 했습니다. 칸트는 처음에는 객관적 인식을 순수한 수의 계산에 국한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를 직관적으로, 다시 말해서 물리 역학으로 고찰하고 이러한 직관을 분명히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사상을 이원론, 심지어는 삼원론 (三元論)으로 구분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균열은 놀라운 잔여물의 공간을 형성시키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칸트는 뚜껑 내지는 지붕 없는 영역에서 헤매게 되었습니다. 가령 누메논의 인간이 이른바 당위성이라는 여명의 공간 속에서 고착되어 있는 경우를 고려해 보세요.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물질에 부착된 메커니즘이라는 반지는 결국 폭파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칸트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물리 역학이라는 카테고리에 도저히 담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행위의 조건으로서의) 인간적 자유, (보편적 자연 법칙의 특수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사실적 진리 vérité de fait” 그리고 (내재되어 있는 자연의 목표인) 생명을 지닌 조직체는 이른바 메커니즘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 포함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칸트의 (목적론적인) 판단력의 비판은 생명을 지닌 조직체의 어떤 제한된 특성으로 근접해 나갑니다.

 

칸트는 이미 『천체의 이론』에서 다양한 현상 앞에 하나의 부분으로 가로놓여 있는, 여러 생명체의 제한된 특징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가령 생명과 자유는 칸트에게는 다만 “진리를 탐색하는 이성을 위한 하나의 차단기”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천체에 관해 지금까지 날조된 이야기가 자신의 구체적인 현실적 공간을 차지하게 되든가, 아니면 이른바 어두운 질적 특성이라는 푹신한 방석 위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자신의 우주론에서 물리 역학적으로 작동되는 물질의 운동을 그야말로 하찮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물리 역학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기껏해야 어떤 곤충의 애벌레를 축조해내는 짓거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그의 저서 『판단력 비판』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물리 역학에 집착하는 것은 칸트에 의하면 “언젠가 뉴턴이라는 물리학자가 등장하여 처음부터 아무런 의도를 지니지 않은 자연 법칙에 근거하여 기껏해야 풀줄기 하나가 출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고려할 때 칸트가 자연의 내재적인 운동의 관점보다도 자연에 대한 어떤 목적론의 관점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칸트의 이러한 목적론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물리 역학에서 말하는 인과율이라는 “작용 원인causa efficiens”과는 정 반대되는, 오로지 “최종의 원인causa finalis”과 함께 하는 관찰의 공식으로서의 “발견의 원칙ein heuristisches Prinzip”에 근거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객관적 인식의 가치를 고려할 때 소재주의 그리고 종교 유신론 사이에는 별반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에피쿠로스가 목적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으며, 스피노자가 목적론적 소재주의를 표방했지만, 신과 자연을 동일하게 파악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차이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판단력 비판』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몇 개의 공식으로 천명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 속에 내재한 목적으로서의 생명을 지닌 조직체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각될 수 있는 모든 목표 가운데 가장 숭고한 것으로서의 인간입니다. 인간은 도덕성의 주체로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관찰하는 어떤 원칙을 요구합니다. 칸트는 도덕적인 엄밀성을 너무나 강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그가 물리 역학의 동인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이른바 전통 신학에서 거론하는 초감각적 특성을 더욱 강하게 요청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칸트는 언젠가 우주를 탐구할 때 자신이 루크레티우스를 존경한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리 역학에 관한 신뢰는 『판단력 비판』에서 어느 정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령 칸트는 인간의 행복을 인간을 품위 넘치게 하는 인성과 미덕의 결과라고 간주하지만, 물리 역학의 결과 역시 인간의 행복에 부분적으로 기여한다고 은근히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물질 이론이 추구하는 현세의 향락을 자신의 윤리학으로부터 그리고 물리 역학적으로 더 나은 세계를 축조하는 작업으로부터 배제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는 “(신의 창조 행위 없는) 생명 탄생의 가설generatio aequivoca”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는 물리 역학의 기능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칸트는 이러한 주장을 현세의 향락을 위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엄밀한 도덕을 강조하는 데에도 원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칸트는 오랫동안 물리 역학 그리고 목적론 사이의 이원론으로 인해 갈팡질팡 헤매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고립된 방향에서 두 가지 사항을 상호 조정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의 제한된 담론의 오성이 아니라, 직관적인 오성 속에서 어떤 조정의 방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오성은 어떤 한계 없는, 포괄적인 현실적 토대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적 토대는 칸트에 의하면 형태와 함께 내용이 일탈되어 나오는 물질의 근본이며, 두 개의 개념, “지적 직관” 그리고 “물 자체”는 그것과 일치되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칸트는 여기서 도덕적 법칙이라는 최상의 이성의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소유하고 있는 현실적 토대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어느 가상적인 신이 존재하여, 자신이 조종하는 대로 모든 것을 헤아리며, 자신이 헤아리는 대로 모든 것을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당김과 배척은 어쩌면 오리의 오성의 작용에도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칸트는 자신의 목적론을 확정 짓는 작업에서 이러한 운동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시켰습니다. 기계론적 물질 그리고 그 법칙은 칸트의 견해에 의하면 학문의 객관적 진실성을 모조리 포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의 나라의 실현이라고 하는) 가치를 완전무결하게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칸트의 철학에서는 물질의 운동과 도덕적 가치의 추구 사이를 이을 수 있는 변증법적이며 객관적인 가교는 전적으로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의 본질 그리고 목적론의 본질을 학문으로 개진할 때 칸트는 제반 문제점 근처에서 내재적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간간이 신학적 초월의 특징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흐릿하게 만들지만 말입니다. 칸트는 물질을 주로 물리 역학의 관점에서 파악하였으며, 그것을 학문 이론적으로 인간의 삶 그리고 역사로부터 배제시켰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계몽주의자, 칸트의 눈에는 삶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역사 자체가 기존하는 세계를 변화시키고, 완전한 무엇으로 출현시키게 하는 요청을 위한 하나의 내재직인 도구로 비쳤습니다. 요약하건대 칸트의 우주생성 이론은 자연이 물리 역학의 측면에서 얼마나 놀라운 작용을 행하는지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비해 그의 『판단력 비판』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물질과 자연과는 차원이 다른 까닭에- 물리 역학이 행하는 놀라운 작용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23 철학 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로흐: 셸링과 물질 (2)  (0) 2022.03.20
블로흐: 셸링과 물질 (1)  (0) 2022.03.19
블로흐: 칸트와 물질 (2)  (0) 2022.03.10
블로흐: 칸트와 물질 (1)  (0) 2022.03.09
서로박: 루돌프 바로의 "양자 택일"  (0) 2021.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