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블로흐: 칸트와 물질 (2)

필자 (匹子) 2022. 3. 10. 09:53

(앞에서 계속됩니다.)

 

물질의 개념은 이 대목에서 네 가지 카테고리의 목록에 의해서 다시금 순수 이성의 비판으로부터 일탈된 다음에 엄정 중립적으로 분할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구성되는 것은 물질의 가능성이 속해 있는 개념들입니다. 이때 네 가지 등급의 주요 성분이 명징한 모습으로 출현하게 됩니다. 이것들은 다름 아니라 1. 양적 특성, 2. 질적 특성, 3. 상관관계 그리고 4. 논리적 양식이라는 네 가지의 주요 관점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두 번째 질적 특성이라는 관점은 무엇보다도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물질의 질적 특성을 가리키는데, 네 가지 주요 관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세 번째 관점은 상관관계의 관점을 지칭합니다. 상관관계의 관점은 순수 이성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나 “경험의 여러 유사성”과 일치되는 면을 부각시키도록 적극적으로 기능합니다.

 

부언하건대 상관관계는 아주 편안한 특징을 지닌 성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물질이 항시적으로 실체를 위해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해줍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작품인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원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동적 특성과 관련되는 사항입니다. 왜냐하면 역동성은 진정으로 하나의 변증법적인 단호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동성을 통해서 끌어당김과 배척, 다시 말해서 인력과 반발이라는 특징을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특성은 주지하다시피 칸트의 우주 이론에서 이미 잘 알려진 것인데, 유동하는 물질의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본적 특성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을 집필하기 전에 「부정적 위대성의 개념을 지혜로운 세계 속에 도입해본 시도Versuch, den Begriff der negativen Größe in die Weltweisheit einzuführen」(1763)라는 기이한 글을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여기서 인력 그리고 반발은 어떤 변증법적 운동으로 이해하면서 지속적으로 긴장관계를 이루는 “현실적 대립Realentgegensetzung”이라고 언급된 바 있습니다. 말하자면 칸트는 밀침과 당김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현실 토대의 갈등conflictus der entgegengesetzten Realgründe”으로부터 자연의 어떤 놀라운 변증법을 예견한 셈입니다.

 

칸트가 언급하는 형이상학적 기초 원리의 역동성은 양극성의 평가 전락과 마주칠 때는 과도기적으로 어느 정도 축소되고 제한을 받습니다. 여기서 끌어당김 그리고 밀침은 물체의 상호 관련되는 특성 그리고 서로 파고들 수 없는 특성이라는 두 가지 기본적 에너지입니다. 만약 여러 물체의 이러한 움직임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상호적인 충돌, 혹은 일원적인 결합 등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공간은 항상 공허하게 머물고, 물체가 특정 공간에 정착되지 못하게 되는” 양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물질의 이러한 특성을 원자 이론의 물리 역학과 구별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리 역학은 칸트에 의하면 물질에서 에너지가 생성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물질 내부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게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에너지가 물질을 형성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두 가지 기본적 에너지로서의 당김과 배척에 관한 이론은 칸트, 피히테, 셸링 그리고 헤겔 등의 사상에서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사상 속에는 언제나 양극성을 갈구하는 의향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칸트 스스로 물리 역학의 학문적 결과를 얼마나 좌시하는지는 그의 세 번째 주요 저작물인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원리』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관찰은 오로지 물체와 물체 사이의 관계의 관점에서 다루어질 뿐입니다. 물체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칸트가 분명히 지적하려던 것은 모든 유형의 생명 부여 내지 물활론에 대항하는 물리 역학의 투쟁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인과율에 의하면 “물질의 모든 변화는 어떤 외부적인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지닌 조직체는 칸트에 의하면 결코 물질의 근원적 상태가 아니라고 합니다. 물리적인 에너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심리적인 에너지로 변모되지 않으며, 심리적 에너지 역시 물리적인 것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김과 밀침에 관한 칸트의 이론은 물질 속에 생명체가 도사리고 있다는 물활론을 배격한다는 점에 돌바크의 『자연의 시스템』과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일치점을 보여줍니다. 이 점에 있어서 칸트의 견해는 기계적 유물론과 매우 근접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과연 어째서 기계주의 물질 이론은 완전할 수 있을까요? 기계주의 유물론의 소재는 스스로를 위해서 어떠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단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원리』에 대한 관심을 잠깐 접어두고, 다시금 『판단력 비판』을 내용을 전제로 하는 『순수 이성 비판』의 핵심 사항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칸트의 책들은 의외로 물리역학에 대항하는 결론을 담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뉴턴의 자연은 그야말로 만능적 힘을 여지없이 활용하는 것 같지만,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무엇보다도 이성 비판에 집중함으로써, 자연의 본질적 의미가 약화되어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 말하자면 물질의 “물 자체”는 우리에게 전혀 인식되지 않으며, 물질 이론은 총체적 관점을 통해서 하나의 보편적 진리로 자리매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칸트의 경우 언제나 외적 의미의 상관관계 속에서만 주어져 있습니다. 설령 물질이 현상으로 인지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상관관계를 총괄적으로 칭하는 개념에 불과합니다. 물질은 단순히 외적으로 기능하고 작용하며, 영역을 채우는 공간의 일부만을 우리에게 알려줄 뿐입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외적 의미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상의 개념으로서의) 물질의 예지적 특성은 (내적 의미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상의 개념으로서의) 물질의 예지적 특성보다도 더욱 폐쇄적이며 더욱 감추어져 있습니다. 물질의 이러한 두 가지 예지적인 특성은 칸트에 의하면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사유 가능한 무엇, 다시 말해 “누메논noumena”에 해당할 뿐이며, 결코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무엇, 다시 말해 “페노메논phänomena”일 수 없다고 합니다. 세계는 오로지 오성에 의해서 추론 가능한 자유로움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여기에는 기계주의라 하더라도 무작정 예외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순수 이성을 비판하는 행위는 세계에 대한 관점을 총체적으로 요청하는 모든 요구를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황당한 곳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순수 이성의 반대 명제”를 통해서 어떤 완전히 대립되는 명제를 합리적으로 증명해낼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칸트가 중요한 사항으로 지적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모든 반대 명제 속에서는 -그게 자유든 메커니즘이든, 혹은 신이든 신 아닌 존재든 간에- 어떤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편 물리 역학의 명제가 주어진 현상의 세계에 적용될 수 있다면, 다른 한편 관념론의 명제는 물 자체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입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실천 이성이 무엇보다도 우선적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간파할 수 있습니다.

 

만약 칸트가 두 가지 명제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어떤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기계주의 물질 이론은 신앙의 내용과 비교할 때 어느 정도 불이익을 당할 게 뻔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죽음 내지 영혼의 불멸성이라든가, 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발언들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어떤 증명될 수 없는 무엇으로 쉽사리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불가지론에 의해서 얼마든지 자양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반면에, 기계적 물질 이론은 이러한 불가지론적인 중립주의로 인하여 피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물질은 칸트의 견해에 의하면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이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규제적 원칙”입니다. 물질에게는 중립성이 보장되지만, 신앙에 비해 훨씬 호의적인 특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칸트는 물질을 불가지론의 두 가지 규제적 원칙에 편입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은 이러한 이원론 속에서 (소망의 차원에 머물고 있는) 신앙보다도 우선하는 권한을 지닙니다.

 

칸트는 어떤 일신상의 편안함으로 이유로 물질과 신앙이라는 이원론을 내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비참상”이 어떤 첨예한 비밀스러움을 내재한 독일 철학자들에게 그렇게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칸트는 검열로 인해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지식을 제한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프로이센의 문화부 장관은 그의 종교 강연을 금지시켰지만, 칸트는 권력자의 막강한 직책을 안겨줄 정도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칸트는 이보다는 오히려 점점 노골적으로 중시되는 수의 계산이라는 원초적 에너지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이 신앙 그리고 물 자체라는 두 가지 불가지론적 이원론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학적으로 중요하게 자리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출구의 등급이라는 유형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