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이어집니다.)
이로써 유토피아는 정의를 벗어난 현실 상황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그래, 그것은 정의에서 벗어난 현실 상황 이전에 이미 의식된, 하나의 가르침으로 이어져온, 지금도 그러한 이념에 의해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이는 횔덜린의 『히페리온』이 말하고자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서간체 소설에서 “시민주체Citoyen”의 “끼니 문제와 직결되는 유토피아의 입장”에서 장차 도래할 부르주아 계층을 비판하지 않았던가요?
(여기서 “끼니 문제와 직결되는 유토피아의 입장”은 원문대로 직역하면 “식탁 앞에서 유효한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주인공 히페리온과 같은 시토이앙은 생존에 가장 필요한 재화 및 노동을 중시하지만, 다른 한편 다음의 일을 삶의 중요한 영역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즉 인간의 영혼을 갈고 닦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예술을 추구하는 일말이다. 이에 비하면 18세기 말의 유럽 사람들은 직업, 돈,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히페리온』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 2권 마지막의 3장이다. 이는 독문학사에서 “독일상 Deutschlandbild”을 연구하는 데 무척 중요한 대목으로 알려져 있다. - 역주) 시민주체의 한 사람인 히페리온은 주위로부터 경시당하여 국외자로 머문 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시대를 비판하고 경고하였습니다.
이상과 체념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실러 Schiller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한 번도 발생하지 않은 무엇은 결코 저절로 늙는 법이 없다.” 만약 이 문장을 유토피아와 그 요구 사항과 관련시키면, 우리는 실러의 이 발언을 다음과 같은 전제 하에서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실러의 첫 문장에다 “아직 noch”이라는 부사를 첨가하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실러의 문장은 “다른 유머로 표현하자면 cum grano salis” 역사와 잠재성을 이해하는 오성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 될 것입니다. “아직 한 번도 발생하지 않은 무엇은 결코 저절로 늙는 법이 없다.”
(유토피아는 주어진 현실의 비참한 상황을 대할 때 싹튼다. 특히 그것이 사회의 문제를 다룰 때, 사회 유토피아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것은 주어진 현실과 직결되는 게 아니라, 미래에 도래할지 모르는 가상적인 (때로는 바람직한, 때로는 나쁜) 사회상을 겉으로 다루고 있다. 한 시대가 변화되면, 유토피아는 더러는 사회 유토피아로 변모되고, 더러는 그 자체 추상적으로 머물게 된다. 문제는 구체적 사회상으로 변화되는 유토피아가 반드시 현재에 도래한 미래 사회와 일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때 유토피아는 제 구실을 다하고사라지며, 새롭게 변한 현실은 어떤 또 다른 유토피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바람직한 사회를 항상 추구하기 때문에 “늙는” 법이 없다. - 역주)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사회 유토피아는 두 가지 사항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노동과 거리가 먼, 축복받은 삶이며, 다른 하나는 품위로 가득 찬 목표 및 우리 주위의 심원한 지평을 통한 인간화의 작업입니다. (인간화의 문제는 철학, 정치학, 역사학, 법학 그리고 신학의 영역에서 휴머니즘의 근본적인 의미를 지적하고 있다. 브라이덴슈타인: 인간화, 박종화 역, 서울 1972, 부록을 참고하라. - 역주) 위대한 예술과 종교는 어떤 유토피아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그 자체 놀라운 유토피아의 작품입니다. 그렇기에 예술과 종교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채 우리 앞에 주어져 있습니다.
만약에 한 시대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엇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것을 독단적으로 거부하면, 그럴수록 그 시대는 더욱더 유토피아와 결부될 수밖에 없습니다. (블로흐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 시대의 가치가 전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적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으면, 그럴수록 그 시대는 유토피아를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여기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은 바로 변화의 촉매이며, 혁명을 위한 효모와 다를 바 없다.- 역주)
만약 우리에게 적절하게 활용되고 기능하는 미래의 차원이 주어져 있지 않는다면, 유토피아는 결코 기존하는 현실적 상황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몰락하는 시대는 기껏해야 “혼돈과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 horror vacui”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렇지만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하는 시대는 유토피아의 의식이 생동하면서 극단적으로 더 나아지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만약에 한 시대가 더 이상 추상적인 유토피아를 견지하지 아니하고, 문제의 방향만을 전달해주려고 한다면, 그 사회는 위험할 정도로 방향을 처음부터 잘못 설정한 셈입니다. 우리, 다음과 같이 가정해보기로 합시다. 즉 혁명이 추상적 유토피아와 관련된 “이상 Ideal”을 실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혁명은 단순히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상을 더럽히게 될 것이며, 파국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그 이상을 파괴해버릴 것입니다.
만약 이상적인 목표가 거짓되지 않고, 파기당하는 법이 없이 우리의 눈앞에 머무르고 있다면, 오로지 이 경우에 한해서만이 혁명은 다음의 사항을 가능하도록 완성될 것입니다. 즉 기존 현실의 경향이 어떤 새로운 사회로 이행되기 위하여 스스로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사항 말입니다. 과거의 사회 유토피아는 미래 사회의 가장 축복받은 인간 삶을 부풀려서 표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간 삶은 오로지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수용될 경우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뒤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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