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서로박: 캄파넬라의 철학시편 (1)

필자 (匹子) 2021. 6. 30. 09:56

생존과 저항은 꿈을 위한 것이다.

- 토마소 캄파넬라의 『옥중시편』을 중심으로

 

: 반갑습니다. 오늘은 저항이라는 주제로 토마소 캄파넬라의 철학적 옥중시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저항과 관련하여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캄파넬라의 시문학을 선택하였는지요?

 

: 저항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국가의 폭력에 대한 개인의 반항을 연상시킵니다. 외국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강정 마을 해군기지 반대 데모, 밀양의 송전탑 건설에 대항하는 데모를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만 저항은 다양한 의미론적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습니다. 완강한 반항 대신에, 조심스러운 사보타주를 생각해 보세요. 자기 보존의 노력으로서의 생존 역시 저항의 한 가지 방식일 수 있지요. 국가의 폭력 앞에서 힘없는 개인으로서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노력 또한 저항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대화를 통해서 “생존과 저항은 꿈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으면 합니다.

 

: “폭력에 이기려면 폭력보다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Brecht)는 것도 한 가지 저항의 방식이라는 말씀이지요? 일단 작가의 생존의 문제에 관해 논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작가들은 국가의 무소불위의 횡포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곤 했습니다.

 

너: 오늘날 대부분 작가들은 가난과 고독 속에서 살거나, 국가의 검열로 인해서 핍박당하곤 합니다. 시인과 작가는 카산드라의 운명을 안고 있으니까요. 시대의 암운을 예견하면, 민초들은 이를 무시하기 일쑤이고, 당국은 당국대로 예언녀, 카산드라를 탄압합니다. 이를테면 김남주 시인을 생각해 보세요. 문제는 국가의 이러한 횡포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경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술가가 당해야 하는 핍박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유의 “버찌”를 만끽하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고 말입니다. 이 경우 창작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며, 나아가 자신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캄파넬라 역시 오랜 옥중 생활 속에서 극한의 아픔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 창작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간헐적이었지만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체험할 수 있었지요.

 

: 캄파넬라는 이탈리아의 지식인으로서 우리에게 『태양의 나라 La città del Sole』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서 시를 집필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억할만한데요? 일단 캄파넬라의 삶의 행적에 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 네 캄파넬라는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학업에 대한 욕구 때문에 도미니크 수도원에 입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교단은 오로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만을 다루었고, 그 밖의 다른 고대 및 르네상스 학문을 철저히 좌시하였습니다. 그는 교단의 이러한 학문적 편협성을 납득할 수 없었으며, 선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1589년 캄파넬라는 교단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나폴리로 떠납니다. 얼마동안 가정교사 일을 전전하다가, 뜻있는 학자들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텔레시오의 자연과학에 매료된 그는 심지어 1593년 갈릴레이를 찾아가 헛되이 배움을 청합니다. 뒤이어 캄파넬라에게 인고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1599년 캄파넬라는 정치 세력에 연루되어 그해 9월 6일에 감옥에 수감됩니다. 1600년에 재수감되어, 1627년에 출옥했으니, 무려 27년간 옥살이를 치른 셈입니다.

 

: 장기수로서 그렇게 오랫동안 옥살이한 셈이로군요. 출옥 후에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너: 캄파넬라의 죄목은 역모에다가 이단의 혐의가 추가되어 있었지요, 이단 죄의 혐의는 놀랍게도 “자살 소동”으로 인하여 사라지지만 말입니다. 캄파넬라는 출옥 후에 학자로서의 명성을 약간 누렸으나, 나폴리에서 더 이상 편안히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에스파냐의 독재체제는 오랫동안 그의 사고를 옥죄였으며, 캄파넬라의 재능을 시기하는 자들은 그에게 이단의 혐의를 씌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634년 12월에 노구 (老軀)를 이끌고 프랑스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저서 집필과 출판에 매진하다가, 약 5년 후에 유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 그런데 말씀 가운데 자살 소동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요? 그리고 감옥에 수감되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 일단 감옥에 갇히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지요. 1599년 일시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캄파넬라는 칼라브리아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키려고 거사를 꾸미는 젊은이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에스파냐의 폭정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거대한 무력 투쟁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지만, 다른 한편 이탈리아 젊은이들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캄파넬라는 이들을 만나, 자신의 신권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고를 전하면서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합니다. 혁명의 시대는 조아키노 다 피오레의 계시의 이론에서 이미 검증되었다고 말하면서 동지들의 거사를 독려한 것입니다. 1600년에 캄파넬라는 다시 체포됩니다.

 

: 말씀을 들으니, 남한의 70년대 초의 시대적 분위기가 생각납니다.

: 네, 어느 정도 비교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종교재판소의 횡포는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 사람들은 그에게 이단의 혐의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를 바티칸으로 송치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이탈리아 당국은 캄파넬라에게 반역의 혐의를 추가하였습니다. 1600년 2월 7일 캄파넬라는 수차례 고문을 당합니다. 캄파넬라는 도합 일곱 번 고문을 당했습니다. 여섯 번째 고문은 무려 40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살갗이 찢어지고, 그의 피는 감방의 빗물 통을 흥건하게 채워졌다고 합니다.

: 이렇게 끔찍할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