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아비켄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 (9)

필자 (匹子) 2020. 3. 5. 15:56

2. 두 번째는 개별적 오성 그리고 보편적 이성에 관한 것입니다. 아비켄나는 후자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보편적 이성에 대한 어떠한 의혹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로써 그는 특권, 관습 그리고 믿음과 같은 편협함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개개인의 개별적인 오성은 수동적인 무엇으로 출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성은 자신과 결부되어 있는 개별적 육체의 행동양상에 의해서 결정되는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개별적 오성은 수동적입니다. 그 이유는 오성이 육체와 결부되어 있으며, 특히 소재의 수동적인 무엇, 수용하는 무엇 그리고 기껏해야 소재를 축적하는 일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보편적 오성은 능동적이라고 합니다. 혹은 그것은 고유한 형태로서 오성이 작용하는 에너지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보편적 오성은 개별적 육체의 행동 양상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인간성의 비개인적인 수뇌부라고 할까요?

 

수동적인 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냥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반면에, 능동적인 누스는 인식 행위를 촉구하고 무언가를 인식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능동적 이성이 이른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일원적 특성과 과연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일원적 특성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노예는 오로지 말하는 노동 기계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일원적 특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유인의 영혼과 육체에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비-그리스인들을 그런 식으로 선천적 노예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이성을 그리스인들의 보편적 정신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행동하는 이성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의 정신이라는 어떤 요소로 생각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비켄나의 경우 행동하는 이성의 비-개인적인 특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와는 전혀 다릅니다.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이성은 철학의 역사상 맨 처음으로 아비켄나에 의해서 모든 인간 존재의 지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일원적 장소로 정의 내려지게 된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이성은 아비켄나에 의해서 비로소 이른바 비-행동양상, -개별성이라는 단순한 규정으로부터 벗어나서 비로소 인간성 그리고 우주적 특성으로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능동적 이성의 내용 역시 아비켄나의 경우 종교 내지 신앙과 결부된 의미, 다시 말해 교리의 차원에서의 의미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아비켄나는 오로지 유일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만을 집중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능동적 이성에 관한 어떤 철학적 의미를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의미는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종교적 교리와도 무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능동적 이성의 의미가 중요한 까닭은 나중에 아베로에스가 말한 바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례 속에 인간 지성의 마지막 목표, 다시 말해 지고의 인간적 완전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의 보편적 이성이 출현하게 된 과정 속에는 사고의 여러 방향이 출현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이슬람 사상가들의 범신론적 입장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비켄나의 사상입니다. 범신론의 견해에 의하면 행동하는 지성은 초감각적인 지적 능력의 순서에 따라 아래로 향해서 끝을 맺게 됩니다. 이는 마치 신의 정기가 여러 행성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결국 달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로 이전되는 경우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지성은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에너지로부터 파생되어 직접 우리의 오성 속으로 유입되는 무엇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에너지는 오성을 환하게 밝히고, 우리의 오성 속에서 우주의 여러 존재들의 모사된 상을 출현시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플라톤주의의 유출 이론입니다. 10개에 해당하는 지혜의 에너지는 말하자면 천구의 정령으로부터 유출되는데, 이는 몇 년 후에 유대교의 카발라 사상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천구의 정령 그리고 지적 특성 사이의 관련성은 결코 주어진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게 아니라, 고대의 철저히 신화적인 내용과 점성술과 결부된 신화에서 도출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켄나의 경우 행동하는 오성은 이른바 가장 낮은 단계의 천국의 지성으로서 설명되기는 하지만, 점성술의 특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경고한 바 있지만, 어떤 신의 정신과는 구별되는 무엇입니다. 다시 말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오성은 인간 존재의 일원성으로 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적인 일원성unitas intellectus에 관한 관용의 정신을 지닌 사상과 만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오로지 하나의 유일한 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이성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하나의 일원적 특성으로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스토아학파 역시 지적인 일원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모든 인간 속에 도사린 공통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기본적 사고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비켄나는 이러한 사고를 더욱더 첨예하게 가다듬어서, 주어진 종교적 교리의 독단론으로부터 일탈시켰습니다. 스토아학자들은 지적 특성이 인간에 공통되는 특징이라고 피상적으로 말하면서,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마구 뒤섞인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통 속에 지적인 일원성이라는 개념을 집어넣었습니다. 이로써 로마 제국의 지배계급은 스토아학파조차도 분명히 간파하지 못한 인간 평등의 본질적 의미를 예리하게 투시할 리 만무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아비켄나와 이후의 아베로에스는 지적인 일원성의 개념에 도사린, 고향사람들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대해 무척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들은 이슬람 종교의 외부 세계는 온통 캄캄한 밤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비켄나는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이성의 일원성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사고는 이슬람 뿐 아니라, 기독교의 절대성에도 상처를 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의 절대성은 모든 다른 종교, 다른 사상의 폭력을 거부하려는 그리스도의 전권 (全権)으로서 베드로에게 하사한 천국의 열쇠라고 표현된 바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간에 자신의 고유한 종교의 절대성을 파괴하려는 모든 노력을 끔찍한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척결해나간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유럽 사람들은 아비켄나와 아베로에스가 추적하여 인간 존재의 지적인 일원성이라는 특성을 단호하게 허튼 이론이라고 매도하고 철저히 비판하였습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비켄나 그리고 아베로에스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의 이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함께 지적 일원성에 관하여. 아베로에스주의자들에게 반대하며De unitate intellectus contra Averroistas를 집필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슬로건은 그 자체 명약관화합니다. 즉 아비켄나의 이성의 어떤 일원성에 관한 이론 속에는 어떤 종교적 관용에 관한 새로운 파토스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기한 문헌은 아비켄나의 주장 속에서 이른바 거짓된 무엇이라든가 자명할 정도로 잘못된 무엇을 지적하기 위해서 집필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 때문에 출현한 것입니다. 즉 아비켄나가 기독교의 수사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전대미문의 사상적 흔적을 드러내고 있으며,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종교적 규칙을 공격하고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어쩌면 흔히 사람들은 자기 욕구와 어리석음 때문에 과거의 질서를 거의 광신적으로 맹종하는 경향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이 모든 논거는 인간의 이성 속에 도사린 관용 정신을 파기하게 만들고 다수의 견해를 강권하게 합니다. “지적인 일원성에 관한 이념은 더 이상 모든 제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세와 연결되었습니다. 가령 혁명적 재세례파 사람들은 이러한 이념을 모든 세상에서 출현한 가련한 콘라트의 강림의 정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프라하 선언에서 인민과 믿음이 산산조각 나서 분산된 상황에 관해서설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계몽주의가 도래하던 시점에 그토록 다양하게 이해되던 자연의 개념은 여러 가지 다른 의미와 함께 아비켄나가 말하던 지적인 일원성과 근친한 의미로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만인이 보편적 이성을 일원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사고가 당시에 여전히 신의 권능을 떨치지 못한, 천구로 덮여 있는 신-스토아사상에 의해서 절반 정도 은폐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능동적 이성은 계몽주의에 이르러 자연법, 자연의 도덕 그리고 자연 종교 등의 관점에서 다시 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상기한 사항을 고려한다면 평화라는 의미는 지적인, 혹은 우주의 동인intellectus agens vel universalis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인을 위한 평화는 실천하는 올바른 견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소재와 형식의 관계와 관련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비켄나는 이러한 관계를 점점 성장하여 변화된 상으로 파악했습니다. 물론 그가 철학사에서 첫 번째로 소재와 형식의 변화를 추구한 것은 아닙니다만, 아비켄나를 기점으로, 다시 말해 아비켄나를 통해서 하나의 학파가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인 스트라톤Straton은 소재 속으로 작용하여 영향을 끼치는 형태를 추적했는데, 그의 사상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고립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페리파토스학파 내에서 고유한 철학적 작업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고 소진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학 행위는 하나의 개별 학문으로 특수한 작업으로 치부된 채 분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위대한 알렉산드로스 아프로디시아스만이 유일하게 자연의 지식을 추구하는 스트라톤의 사상을 계승하여, 그것을 발전시켰을 뿐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천체로서의 신soma theion”을 설파했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키케로가 스트라톤에 관해 언급한 문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신의 에너지는 저세상의 정신과는 무관하게 자연 속에 주어져 있다.Omnem vim divinam in natura sitam esse.” 그런데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좌파는 물질 개념이라는 한 가지 사항만을 염두에 둔다면 스트라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아프로시아스가 아니라, 오로지 아비켄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아베로에스 역시도 아비켄나의 오리엔트 철학Philosophia orientalis를 접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아프로디시아스가 고찰한 어떤 싹트는 범신론의 중요성을 발견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좌파 사상의 핵심적 내용을 효과적으로 언급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과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재를 완전히 정해지지 않은 무엇, 형태를 갖추지 않은 무엇으로 가르쳤습니다. 말하자면 소재에 작용하는 것은 한마디로 스스로 무언가를 창조해내지 못하지만, 대신에 모든 것을 창조하도록 하는 무엇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여기에 작용하는 첫 번째 형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완전히 구분된 원초적 물질, 혹은 단순히 수동적 가능성으로서의 무엇이며, 어떤 관계 속에서 현존하는 무엇입니다. 만약 소재가 이와는 달리 모든 세상의 형체로 나타나듯이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형태와 결부되어 있다면, 지속적으로 머무는 잠재적 역동성의 존재δυνάμει όν”, 달리 말하자면 가능성 속에 현존하는 존재 In-Möglichkeit-Sein에다 어떤 유형의 함께 하는 작용이 첨가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함께 하는 작용이란 작용형태가 들어서서 하나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결정짓거나 개별화시킵니다. 이는 때에 따라서는 방해 내지 훼방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세상에 출현한 두 번째 물질은 다음의 사항을 만들어냅니다. 즉 오로지 목적에 따라 어떤 무엇을 형체로 드러나게 하는 작용 형태, 혹은 엔텔레케이아만이 유일하게 잠재적 역동성으로 향하는κατα το δυνάτον존재, 달리 말하자면 가능성으로 향해 현존하는 존재das Nach-Möglichkeit-Sein”에 합당하게 실현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