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이론

서로박: 블로흐의 인간신 사상 (3)

필자 (匹子) 2020. 5. 31. 10:25

 

셋째로 기독교 사상은 블로흐에 의하면 이른바 천지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복종 대신에 주어진 현세에서 불의와 부정에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거역과 반역의 자세를 지향하고 있다.

 

지금까지 종교의 관건은 거대한 권능을 지니고 있는 권위적인 신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내지는 귀의를 맹세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종교는 역사 속에서 권력과 금력과 결탁하여 주어진 사회의 계율 내지는 이데올로기를 형성시키며, 일반 사람들의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모든 정치적 판단, 결혼과 성 도덕 등은 항상 기존하는 종교의 강령에 의해서 규정되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세상에 끼친 종교의 해악을 신랄하게 지적이고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종교의 또 다른 측면인 메시아를 통한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갈망 그리고 종말론적 기대감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신적 존재를 인간의 존재와 무관한 것으로 일탈시켰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물질을 언급할 때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천상과 지상을 서로 구분시키고 천상의 물질을 “고립되어 있는 형태들 formae separates”이며, 지상의 제반 사물을 “부속되어 있는 형태들 formae inhaerentes”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그는 세계의 근원을 첫 번째 동인인 물질로 규정한 아비켄나, 아베로에스 등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부정하였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은 상부의 신적 존재와 지상의 인간 존재 사이의 이질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탈-신화 이론을 개진하였다. 학문 이전의 신화 이야기는 불트만에 의하면 “기독교 세계의 쓰레기”라고 한다. (블로흐 2009: 88). 여기서도 불트만은 태초의 말씀을 하나의 절대적 진리로 못 박고, 그 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있다. 이로써 그는 종말론의 신화 속에 도사리고 있는 놀라운 반역의 가시를 빼버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오로지 복종만을 채택하고 있다.

 

루돌프 오토 Rudolf Otto 역시 자신의 저서 『완전한 타자』에서 상부의 신적 존재를 우상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신은 우리를 위한 신이 아니다 Deus minime Deus pro nobis”라는 구정에 주목하고 있다. (블로흐 2009: 92). 신은 오토에 의하면 인식 불가능한 존재이며, 인간이 본받을 수 없는 완전한 타자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한술 더 떠서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 내지 단절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블로흐에 의하면 기괴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한다. 신의 계시는 바르트에 의하면 처음부터 인간을 위한 의도적 계획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바르트는 지상의 현실과 신의 현실을 수직으로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종말론을 주어진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피상적 순간으로 흐릿하게 규정하는데,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은 전지전능한 신이 인식 불가능한 존재라는 입장에서 비롯한 것이다.

 

불트만, 오토 그리고 바르트 등의 신학적 입장은 신과 인간 사이의 단절된 특성을 공동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신관 (神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타르소스 출신의 유대인,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세계의 혁명 내지 전폭적인 개혁을 암시하는 묵시록의 끔찍한 상을 추상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가난한 자들의 물질적 심리적 행복을 도모하려는 예수의 의도를 왜곡시켜서, 오로지 참회에 의한 평화 그리고 내세의 행복만을 강조하였다.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빛 - 생명 Φώς – Ζωή”은 오로지 교회의 부흥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것이었다. 가령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타살을 다음과 같이 왜곡시켰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해서 자청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주지하다시피 자청해서가 아니라,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하지 않았던가? 에른스트 블로흐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악랄하게 왜곡된 표현으로 규정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로마서 31. 1, 골로새서 3. 22).

 

요약하건대 기독교 사상의 뿌리는 블로흐에 의하면 종말론의 현세적 의미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 천년 왕국에 관한 기대감은 성자 뿐 아니라, 성령의 존재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난다. 원래 “성령”이란 고대 아테네 사람들의 그리스어 표현에 의하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재판정 내지 변호사 앞에서 일하는 보좌인 내지 소송보조인이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협조자”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루터 성서에서 차용된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단어를 독일어로 “위로하는 자Tröster”로 번역했다. 이로써 성령의 존재는 어처구니없게도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사로 곡해되어 알려지고 말았다.

 

가령 성서의 「욥기」를 생각해 보라. 욥은 어떤 면에서는 야훼신보다도 더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가 정의로운 공간으로 변하기를 애타게 갈망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정의로운 판관인 “피의 보복자 γοηλ”를 소환하고 있다. “위로하는 자”라는 표현은 성령이 수행하는 고유한 임무를 포괄하고 있지 않다. 성령은 한마디로 “피의 보복자”를 지칭한다. 그분은 위로하는 자가 아니라, 복수하는 소송인이다. 다시 말해 부정한 세상에서 정의로움을 위하여 부정과 죄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바로 “원고”로서의 성령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성령은 판관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성령은 오로지 최후의 심판, 다시 말해 마지막의 재판을 통하여 모든 사항에 대해서 정의롭게 판결을 내리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그분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그들의 넋을 기릴 뿐 아니라, 죄악에 대한 진범을 가려내어, 그에게 정당한 죗값을 선고하는 정의로운 판관과 같다. 그렇기에 성령은 “피의 보복자”로 번역되어야 하며, “최후의 심판에 참석하여 정의로운 판결을 요구하는 소송인”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근본적으로 고찰할 때 언젠가 테르툴리아누스가 “진리의 정신”이라고 해석한, 조로아스터 종교의 “보후 마나Vohu Manah”에 대한 사고와 결코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