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이론

서로박: 블로흐의 인간신 사상 (2)

필자 (匹子) 2020. 5. 28. 11:17

 

둘째로 기독교는 블로흐에 의하면 종래의 종교적 관점에 해당하는 태초의 무엇을 진리로 규정하며, 이를 신봉하는 대신에,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현세의 더 나은 삶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마지막 운명 Eschaton”을 메시아적 기대감으로 설정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종교는 서양의 역사에서 신성 (神性)에 근친하여 그것과 “재결합 (re + ligio)”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되었다. 신의 존재, 다시 말해서 “태초의 말씀 λόγος”은 하나의 진리이며, 신앙인은 신을 뜻을 담은 태초의 말씀을 충직하게 지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과거에 존재했던 이데아를 다시 기억해내면 족하다.”라는 플라톤의 “재-기억 ἀνάμνησις 이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재기억 이론은 신앙과 신학의 영역을 넘어서서, 진리 탐구의 과거 지향적 특성을 명징하게 시사한다. 아니나 다를까, 데미우르고스의 천지 창조의 이론은 종교와 학문의 보수주의적 의향을 발전시키도록 끊임없이 작용했다. 실제로 플라톤은 .“이데아 아래에는 새로운 것은 없다.Nil novi sub idea.”고 일갈하였다. 진리는 과거에 존재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언제나 다시 회상하면 족하다.”라는 사고는 고대 그리스의 정태적 숙명적 세계관과 부합된 채 후세에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내면에 세계의 변화에 대한 의지를 약화시키고, 그저 높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배 내지는 복종심을 강화시켜왔다는 사실이다. 진리에 대한 과거 지향적 자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겸허함 내지 무조건적인 굴종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찾으려는 학문적 개척 정신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였던 것이다. 가령 철학자들은 -플라톤에서 헤겔 Hegel, 심지어는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 Jung에 이르기까지-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절대적 원형에 집착하면서, 태초에 존재했던 진리를 재구성하기 위해 지옥의 아헤론 강을 더듬는 일조차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 사상은 블로흐에 의하면 천지창조라는 이른바 알파의 세계관을 지양하고, 기독교의 종말론에 입각한 이른바 오메가로서의 세계 변모의 어떤 가능성을 추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사회의 특징과 기독교 문화권 속의 사회의 그것 사이의 어떤 놀라운 이질성을 간파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정태적 숙명적 특징은 기독교의 전파로 인하여 역동성과 개방성이라는 변증법적 특성을 부분적으로 용인하게 되었다. 예컨대 고대의 예언하는 여인, 카산드라의 발언은 어떠한 경우에도 수정되는 법이 없으며, 델피의 신탁의 말씀은 어떠한 수정 가능성도 없이 모든 인간의 운명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심지어는 올림포스 신조차도 죽는 자를 지하 명부의 세계로 데리고 가는 죽음의 여신, 모이라 Moira의 처사를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고대인들의 삶과 죽음은 예외 없이 그야말로 숙명적으로 돌아가는 오르페우스의 바퀴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향 하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세계관은 이와는 달리 전개되었다. 물론 인간의 삶과 죽음 내지 특정 도시의 숙명은 처음부터 야훼 신에 의해 정해져 있었지만, 메시아를 갈구하는 애타는 기다림은 -비록 작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역사를 바꾸게 하였다. 이를테면 요나의 깊은 간구와 회개의 행위를 고려해 보라. 그것은 야훼 신을 감복시켜서 도시 니느웨의 몰락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조처했던 것이다. (블로흐 2004: 2778). 블로흐는 바로 여기서 기독교 세계관의 역동성과 개방성의 범례를 투시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의향을 드러내는 “아직 아닌 존재 das Noch-Nicht-Sein”를 개진하려고 하였다.

 

기독교의 사상은 알파로서의 태초가 아니라, 마지막 세계, 다시 말해서 오메가로서의 영겁의 시간에 주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묵시록의 비유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요한 계시록은 천사들이 일곱 나팔을 분 다음에 세상에는 대 재앙이 도래하고, 이후에는 새로운 예루살렘이 건설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요한계시록은 마르틴 루터 등 수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비판당해 왔다. 예컨대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는 요한 계시록을 “모든 도둑대장들이 속임수를 부리는 포대기”라고 폄하하면서, 끔찍한 묵시록의 전언 속에서 어떤 허구적 비유만을 고찰하려고 했다. 그러나 찬란한 삶에 관한 “마지막 세상”은 새롭게 도래하게 될 신생의 삶에 관한 신학적 비유의 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부활이란 사망한 그리스도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 기적과 같은 사건이 아니라, 신생에 대한 놀라운 비유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활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에 전파되어, 인간의 새로운 삶,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갱생에 대한 혁명적 비유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계시” 역시 명실 공히 “빠져나옴 Apo-Kalypse”을 시사해주는 놀라운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계시란 세계의 종말 이후에 살아남은 기독교인들이 끔찍한 형벌의 현장으로부터 순간적으로 빠져나와, 차제에 찬란한 예루살렘에서 축복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살게 되리라는 기독교인들의 낙관주의적 확신을 감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가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은 그 자체 의미심장함을 표방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일곱 번째 날이 될 것이다. Dies septimus nos ipsi erimus.”

 

여기서 우리는 블로흐가 추적한 천년왕국설의 유토피아적 특성을 언급할 수 있다. 첫째로 지상의 천국에 관한 갈망의 상은 주어진 비참한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의 상이다. 둘째로 성령의 정신을 내면화하고, 이와 결부된 계시의 전달자가 되하는 자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천국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천국의 뱀은 아담과 이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과 악을 인식하면, 너희는 신과 같게 되리라. Eritis sicut Deus, scientes bonum et malum.” (블로흐 2004: 2739). 만약 자신의 마음속에 신성을 깨닫는 자는 자신의 내면에 천국을 소유하리라고 한다. 셋째로 천년왕국의 이념은 천국으로부터 추방된 인간의 현세의 삶 그리고 구원된 자의 저세상의 삶 사이의 어떤 중간 단계를 구상하게 한다. 넷째로 천년 왕국의 사고는 조아키노 다 피오레의 사상에 의해 발전된 것으로서 권력 계급은 물론이며, 교회와 수사 계급이 사라진 평등한 나라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평등을 지향하는 유토피아의 사고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이를 종합할 때 지상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천년왕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블로흐에 의하면 농민 전쟁을 이끈 토마스 뮌처 Thomas Müntzer라고 한다.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현세의 더 나은 삶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마지막 세상으로서의 메시아적 기대감은 블로흐의 철학 내지 신학의 핵심적 대목이다. 이에 비하면 다음과 같은 블로흐의 견해는 이러한 메시아적 기대감을 표방하기 위해서 지엽적으로 끌여 들인 사항에 불과하다. “세계는 아르무츠드 그리고 아리만이 끝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 “기독교의 가치는 중세에 무엇보다도 이단자를 속출한 데에서 발견된다.” 등의 문장은 그 자체 의미심장함을 표방하지만, 그 자체 블로흐의 핵심적 사상으로 승격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블로흐의 연구의 핵심 사상은 무신론 사상을 도출해낼 수 있는 “은폐된 인간 homo absconditus”의 근본적 실체이며, 유토피아 사상을 끌어낼 수 있는 “종말론적 기대감”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