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이론

서로박: 블로흐의 인간신 사상 (4)

필자 (匹子) 2020. 6. 2. 19:13

지금까지 우리는 블로흐의 기독교 속에 도사린 무신론의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로 기독교 사상은 예수의 행적과 복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아들”에 관한 존재 가치 내지 사상적 단초를 알려주고 있다. 둘째로 기독교는 블로흐에 의하면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현세의 더 나은 삶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마지막 세상 Eschaton”을 메시아적 기대감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아직 아닌 무엇”을 존재론적으로 추적하려는 블로흐의 사상적 의향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셋째로 기독교 사상은 블로흐에 의하면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복종 대신에 주어진 현세에서 불의와 부정에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거역과 반역의 자세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다.

 

성서는 종교 창시자 모세,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 등의 기쁨의 전언을 담은 문헌이다. 그것은 블로흐에 의하면 인민을 위한 문헌이지, 권위적 신을 위한 문헌이 아니라고 한다. 성서는 지금까지 수없이 시간의 앙금에 뜯겨 나갔으며, 의도적으로 가필 정정되었다. 성서 속의 수많은 어색한 구절들은 삭제, 수정 그리고 왜곡 등의 혐의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천민의 폭동, 메시아를 기리는 예언자의 저항적 발언 등은 삭제되거나 수정된 반면에, 엄격한 율법, 제사장의 신분 등이 성서에 첨가되었다. 그렇기에 성서는 블로흐에 의하면 때로는 부분적으로 사제들의 교활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 자체 억압과 저항의 흔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블로흐 2009: 145). 성서를 독해할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 사항이다. 그 하나는 탈- 신정주의, 다시 말해 신의 무조건적인 권위에 맹종하지 않는 자세이며, 다른 하나는 성서의 구절 속에 은폐되어 있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일이라고 한다.

 

넷째로 신은 하늘의 권좌에 앉아서 전지전능한 후광을 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작은 섬광으로 자리할 수 있는 불꽃의 존재일 수 있다. 여기서 범신론과 이신론의 혁명적 특성 내지 과정 철학에서 언급하는 범재신론 Penetheismus의 모티프가 발견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범재신론”이란 초월적 신관인 “유신론Teismus”과 범신론을 결합시킨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것이 신 속에 자리하고, 신은 모든 것 속에 자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블로흐는 신이 인간의 근본적 존재가 의인화되고 이상화된 이상적 상이라고 간주했다. 그렇기에 신적 존재는 블로흐에 의하면 인간이 유토피아적으로 꿈꾸며 끝없이 동일시하려고 노력하는 엔텔레케이아이다. (블로흐 2004: 2794).

 

신의 기운은 하늘 뿐 아니라, 땅에서도 출현하는 무엇이다. 그런데 동양의 유불선 종교는 이러한 기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이를 창조성의 출발로 간주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사항이다. 그 하나는 전지전능한 하늘의 신이며, 다른 하나는 땅의 기운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기 (気), 다시 말해서 신의 그윽한 기운이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으로 스며들 수 있는데, 이 점은 서양에서 영지주의 그리고 에크하르트 선사에 의해 드러났을 뿐,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독일의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 선사 Meister Eckhart의 신비주의 사상 그리고 이와 상응하는 메시아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는 독일 평신도 운동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다.

 

만물의 에너지로서의 기는 아무런 속성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모든 속성을 소유하고 있다. 노자는 생이불유 (生而不有)이며 위이불시 (為而不恃)라, 땅은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이루지만 이를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신과 세계는 우주와 혼돈이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 혼돈과 코스모스의 혼재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내부와 외부가 뒤섞일 때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는 클라인씨의 작은 병과 같은 논리가 아닐 수 없다. 하늘의 신과 땅의 기운의 혼재에 관한 문제는 동학사상에서 언급되는 향벽설위 (向壁設位)와 향아설위 (向我設位)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신의 불꽃이 영혼의 차원에서 “나”의 마음속에 다시금 타오를 수 있다는 믿음, 다시 말해 ”나“의 영혼이 차제에는 신의 작은 불꽃이 될 수 있다는 신비적 갈망은 오로지 요한의 복음서에서만 암시되고 있는데, 개인과 세계의 변화를 스스로 갈구하는 메타 종교의 신앙으로 발전되기에 충분하다.

 

동서양의 종교의 핵심을 투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에 대한 관심사를 약화시켜야 한다. 대신에 우리는 무, 허공 그리고 땅의 기운 등에 관해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석 류영모는 이러한 관점에서 태양만을 강조하지 말라고 선언한 바 있다. 블로흐는 동양의 유불선의 종교에 관해서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동양의 종교에 무지했으며, 처음부터 기독교를 세상에서 가장 발전된 종교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블로흐의 종교관은 범신론 그리고 무신론이라는 철학적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종교의 두 가지 근본적인 경향, 다시 말해서 빛으로 상징화되는 천주 그리고 땅의 기운에 근거하는 허공 내지 무의 에너지를 끝까지 추구할 수 없었다.

 

블로흐가 신학의 본질적인 문제 대신에 인간의 내적 갈망과 성향, 더 나은 사회적 삶에 관한 꿈을 철학적으로 구명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로써 종교와 신학은 블로흐의 사상적 체계 속에는 일부에 불과한 것이었다. 만약 그에게 종교의 본질을 연구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더라면, 그는 분명히 종교의 두 가지 특성과 기능을 완벽하게 서술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막강한 천주의 존재 그리고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비존재로서의 무 내지 허공 그리고 기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업을 가리킨다. 화이트헤드가 창조성 내지 과정 철학의 매개체로 활용한 것은 블로흐에게는 인간신 사상 내지 빛과 어둠의 야콥 뵈메Jakob Böhme의 신비로운 범신론적 관점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요약하건대 블로흐의 신학적 관점은 세상에서 가장 조화롭고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수운의 동학사상을 보조해주는 자료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