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아비켄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 (8)

필자 (匹子) 2020. 2. 25. 10:01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재를 잠재적 역동성의 존재δυνάμει όν로 규정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왁스와 같은 존재로서 그 자체 아무런 특성을 지니지 않는 무엇입니다. 다시 말해서 잠재적 가능성의 존재는 형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를 드러내게 하는 존재입니다. 형태는 목표의 원인이고, 목표의 형체입니다. 그런데 엔텔레케이아는 여기서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소재로부터 배제된 순수한 행위자actus purus”로서의 최상의 형태는 바로 누스입니다. 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순수한 사고의 신입니다. 바로 이러한 입장은 마치 헤겔 좌파가 그러했듯이 그가 사망한 직후에 첫 번째의 좌파의 효과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소요학파의 세 번째 수장인 스트라톤Straton은 소재와 누스의 구분을 용인하지 않음으로써 순수한 누스 속에 도사리고 있는 신의 특성을 약화시켜버렸습니다. 스트라톤은 물리학자라는 별칭을 지닌 철학자였는데,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도사린 자연과 물질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뒤이어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 좌파의 학자로서 고대 후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자로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아프로디시아스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물질에다가 최상의 잠재성이라는 부수적 특성을 부여하였습니다. 나중에 아비켄나는 알렉산드로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언급하면서 소재 속에 영향 형태가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점을 착안해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재 속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 잠재적 형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알렉산드로스가 언급한 최상의 잠재성 개념은 아비켄나로 하여금 자연과 물리의 특성을 강화시키게 해주었으며, 나아가 유대인 학자, 아비케브론으로 하여금 우주의 물질natura universalis”이라는 개념을 추적하게 해주었습니다. 나아가 그 개념은 아베로에스로 하여금 물질을 영원히 자체적으로 유동하는, 하나로 생동하는 무엇으로 규정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로써 물질은 그야말로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이며, 외부로부터의, 혹은 상부로부터의 -영혼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엇으로 확정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관은 하나의 물질 이론으로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 물론 이 경우 물질 이론은 여전히 범신론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를테면 조르다노 브루노는 아비케브론과 아베로에스의 예찬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물질에서 결실 맺게 되거나 스스로 결실을 맺는 우주의 어떤 생명체를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물질은 브루노에 의하면 마치 이전의 신과 같은, 무한한 범위의 생명체이지만, 세상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무엇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의 형태 개념과 관련되는 사고의 방향 그리고 그 영향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의 잠재적인 능력 그 자체를 파기하는 대신에 물질의 적극적인 능력을 인정하는 사고의 방향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야 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좌파의 노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아비켄나에 이르러 고대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에 하나의 이정표 내지 전환점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우파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극점을 이루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한 누스의 개념을 추상화시키고, 현실과는 별개인 천국으로 상승시켜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우파는 소재를 단순한 가능성의 영역 속에 그냥 방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소재 스스로가 단순히 잠재적 역동성의 존재δυνάμει όν”, 즉 가능성 속의 존재의 바깥으로 향해 형체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는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이제 아비켄나에게서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 좌파의 시고를 추적해보기로 합니다. 그것은 세 가지 주요 관점들인데, 이것들은 아비켄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자연과의 관련성 속에서 계속 발전시킨 것들입니다. 첫 번째 관점은 육체와 영혼에 관한 이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관점은 행동하는 오성, 혹은 인간의 보편적인 지적 능력에 관한 이론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관점은 세계 속에서의 소재와 형태 (잠재성과 능력) 사이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주요 관점은 전적으로 세 번째의 주요 관점과 관련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좌파는 물질의 문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재에 더 커다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내세우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육체와 영혼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리의 사상가는 후자, 즉 영혼을 중시합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열망하는 무엇, 느껴지는 무엇 그리고 (동물에서도 드러나는) 생각되는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육체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영혼은 오로지 조직체로서의 육체 속에서 존속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 내부에서 일원적으로 작용하는데, 여기서 영혼의 형태는 분할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인간의 영혼은 그 특성상 동물의 영혼과 완전히 구분됩니다. 그것은 바로 오성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오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동물들의 그룹 영혼과는 구분되는 자신의 고유한 영혼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은 자신의 영혼이 지속적으로 작용하며, 그냥 파괴되지 않도록 작용합니다. 인간의 이러한 개별적 영혼은 아비켄나에 의하면 육체 속에서 새롭게 재생될 수 없으며, 육체가 사멸함으로써 그대로 파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특히 두 번째 사항으로써 아비켄나는 이슬람의 성서인 꾸란의 입장으로부터 완전히 거리감을 취하며 등 돌리지는 않고 있습니다. 나중에 아베로에스는 인간의 개별적인 영혼, 다시 말해서 개체로서의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사멸 후에 중단된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아베로에스의 입장 속의 어떤 논리적 가능성으로 발전됩니다.

 

아비켄나는 육체의 부활을 누구보다도 완강하게 부인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개인적 영혼의 지속적인 생명력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인간이 죽은 뒤에 육체라는 조직체가 사멸한다는 것을 감지했는데, 수사들은 감각적인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두 가지 서로 다른 공간을 설정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의 채찍으로서의 끔찍한 지옥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의 당근으로서의 찬란한 가상적 환시의 상으로서 축복받는 천국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교회의 독단론에 근거하는 내세관에 해당합니다. 아비켄나와 아베로에스는 영혼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 출발하여 논의를 진행했지만, 중세의 기독교 사상가들 어느 누구도 내세에 관한 이러한 이중적 상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상상 속에는 죄를 지을 경우 무엇보다도 저세상에서의 끔찍한 고통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 부글거리는 거대한 솥으로 향해서 자신의 육신을 던져 넣기 위하여 계속 행군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아비켄나는 이러한 고통의 감정을 우리의 내면에 도사린 동물적 영혼에 속하는 무엇으로서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내세에 관한 이러한 상 자체를 의심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견지한, 마치 고문과 같은 끔찍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오성적인 부분은 죽은 뒤에는 고통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세상의 상은 오로지 정신적 차원에서의 (천국에서의) 행복 그리고 (지옥에서의) 불행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얼마든지 수사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아비켄나의 지론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비켄나와 같은 학자들은 내세의 채찍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이를 파괴하려고 하기 때문에 권력 집단인 교회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유형의 학자들을 탄압하고 박해해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