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생기 넘치는 자, 깨어남의 아들, 천체로서의 신
지식과 신앙 사이의 유희는 역사에서 기이하게도 몹시 우의적인 방법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가령 독일의 계몽주의 극작가, 레싱의 세 개의 반지에 관한 우화를 예로 들 수 있지만, 그밖에 상당히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첫 번째 철학 소설 한 편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후자는 이븐 투파일Ibn Tufail의 『생기 넘치는 자, 깨어남의 아들』을 가리키는데, 이 작품의 줄거리는 유럽 문학에 전해져서 반지의 우화보다도 더 폭넓게 회자되었습니다. 이븐 투파일의 소설은 나중에 로빈슨 크루소를 내용으로 하는 일련의 문학 작품의 원전으로서 수없이 활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설 자체는 사상적 근원을 고려할 때 아비켄나의 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소설의 제목 자체가 이미 아비켄나의 문헌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언젠가 아비켄나는 이성의 인식에 대한 충분한 사항을 보여주기 위해서 완전한 고독 속에서 어떤 인식에 도달하는 인간을 가상적으로 설계한 바 있습니다. 이때 그는 그 사람의 이름을 “하이 이븐 야크잔Hayy ibn Yaqzan”이라고 명명했는데, 이 이름은 “생기 넘치는 자, 깨어나는 자의 아들”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생기 넘치는 자, 깨어남의 아들은 각성하는 인간이며, 아편과 같은 마약을 복용한 사람과는 정반대되는 인물입니다. 깨어나는 자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보편적 지성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인간과 결부되어 그 사람을 충만하게 해주는 무엇입니다. 아비켄나의 이러한 생각은 약 100년 후에 이슬람의 영향권에 있던 에스파냐에서 계승되었습니다. 아베로에스의 스승인 이븐 투파일은 자신의 철학 소설의 제목을 “생기 넘치는 자, 깨어남의 아들”로 명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븐 투파일은 아비켄나의 가상적 추론을 검증하기 위해서 그러한 제목을 달았던 것입니다.
이븐 투파일의 작품은 1671년에 『독학하는 철학자Philosophus autodidactus』라는 제목의 라틴어 판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독일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이 서서히 만개하기 시작하려던 무렵인 1783년에 아이히호른Eichhorn이라는 오리엔트 학자는 독일어 번역판 『자연 인간』을 간행했으며, 이후의 판에서는 놀랍게도 장 작 루소의 자연 사상이 은근히 가미되어 있습니다. 장편 소설은 고해의 현실에 홀로 남은 인간만 강조한 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계몽주의의 기본적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 외에는 어떠한 믿음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아비켄나와 이븐 투파일의 “독학하는 철학자”는 고유한 눈을 통해서 자연으로부터 지식과 지혜를 축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사제의 종교적 가르침에 전혀 개의치 않을 뿐 아니라, 잡다하고 불필요한 신화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고유한 사고를 도출해내지 않습니다. 물론 한 가지 기이한 사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독학하는 철학자는 자신의 독자적인 인식의 가장 높은 단계에서 인간과 신의 결합이라는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에 도달합니다.
작품을 고려할 때 자연 추구의 사상은 중세 이슬람의 문화권 전체를 고려할 때 신비주의에서 유래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소설의 주인공은 오랫동안 자연에 대한 실증적 지식을 도출해내지만, 마지막에 신비주의의 관점 속으로 침잠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신비주의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경우에도 그러하듯이 자연에 대한 제반 견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파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신비주의는 아비켄나의 경우 자유롭게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설정하여, 꾸란이라든가 독단론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븐 투파일의 장편 소설은 자신의 이성을 완전한 무엇으로 변화시키는 마지막 단계에서 이르러 신과의 합일을 이루도록 조처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자체 어떤 유형의 엑스타시일 뿐, 계몽적 요소를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작품에 묘사된 자연과 우주에 관한 지식이 독자의 눈에는 그저 낯설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븐 투파일이 수피즘 사상을 포괄하는 아비켄나를 엑스타시의 장인으로 찬양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가령 작가는 아비켄나의 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써 지적이고 영적인 훈련을 거듭하여 자신이 어느 정도 상당한 단계의 높이로 상승되었다고 느낀다면, 그는 순간적으로 진리의 빛으로 생기 넘치게 된 찬란한 광선이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치 하나의 섬광으로 피어오르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번갯불처럼 말이다. 만약 그가 이러한 연습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면, 그의 마음속에는 빛의 광채들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수없이 배가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연습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빛의 찬란한 광채가 끝없이 충만하게 되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 눈 하나 깜박하여 이러한 찬란한 광채들을 접할 수 있다면, 그는 성자의 대문 앞에 발을 들여놓는 자나 다름이 없다, 달리 말하자면 찬란한 광채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자는 존재의 본질에 관한 인상을 얻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무심결에 스치며 바라보는 모든 사물 속에서 어떤 진리를 분명히 투시하게 될 것이다.
수련하는 자는 오랫동안 정진하여 수행하면 마침내 어떤 정지된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일상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를 그저 회피하고 도주하려고 할 테지만, 오랫동안 수련을 거듭한 자는 어떤 정지된 상태에 익숙하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정지 상태에서 다만 깜박거리는 빛의 형상만 인지하지만, 이러한 최종 단계에 들어선 수련자는 이때 명료하고 밝은 광채를 명징하게 인지할 것이다. 이 경우 그는 마치 계속 선남선녀에게 다가가는 사교계의 여인처럼 어떤 지속적인 빛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그는 다음과 같은 인식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즉 세계의 비밀이 마치 하나의 매끄럽게 닦인 거울처럼 진리의 정반대편의 영역 위치한다는 놀라운 인식 말이다. 바로 이러한 단계에 이르러 수련자는 비로소 유일하게 성자의 대문 안으로 자신이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합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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