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빌란트의 "아리스티포스와 그의 동시대인들"

필자 (匹子) 2020. 8. 9. 10:47

아리스티포스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입니다. 그는 견유학파의 형성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고, 향락주의의 생활방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시대의 철학자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수업료를 수령한 바 있습니다. 그의 문헌은 오늘날 전해 내려오지 않으며, 몇몇 문헌학자들의 책에 그의 사상이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몇몇 문장을 인용하기로 하겠습니다.

 

내가 무슨 옷을 입든 간에 동등하게 대접 받는 게 너무 좋다.” “가장 나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 사악한 인간은 우리에게 어떤 끔찍한 범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를 소유한다. 그렇지만 결코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즐거움들을 한꺼번에 응집하는 일이다.” “모든 법칙이 파기된다면, 우리 철학자들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 어떤 변화를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오스 2세가 아리스티포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철학자들은 부자의 대문을 두드리지만, 부자들은 철학자의 대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이에 대해 아리스티포스는 다음과 대답했다고 합니다.철학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지만, 부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ㅎㅎ

 

독일의 계몽주의 작가,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 (Christoph Martin Wielans, 1733 1813)의 미완성 장편 소설 아리스티포스와 그의 동시대인들Aristipp und einige seiner Zeitgenossen1800년과 이듬해에 발표되었습니다. 빌란트는 바이마르 근교의 영지에서 머물면서 어떤 부패하지 않은 아름다운 세계의 전원적 행복에 관한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주어진 현실의 억압에 맞서는 반대급부의 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집필을 시작한 작품이 바로 아리스티포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집필 과정은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가 1801년에 사망했고, 자신의 영지가 근저당 설정이 되어 있었으며, 출판업자로 일하던 자신의 사위인 게스너가 파산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빌란트로서는 집필에 몰두할 수 없었습니다. 1803년에 오스만슈테트의 영지를 포기하고 바이마르로 돌아갈 무렵 원고는 미완성이었는데, 이후에 그는 더 이상 작품을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Bildergebnis für hedonismus

 

위의 캐리커쳐는 향락주의를 비아냥거리기 위한 사악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향락주의는 결코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음욕을 즐기는 사상이 아니다. 향락주의의 향유는 심리적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서 성취될 수 있다.


작품은 서간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도합 네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그리스의 향락적 견유학파에 속하는 아리스티포스 외에도 라이스입니다. 라이스는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운 창녀입니다. 작가는 고대에 실제 존재했던 두 명의 창녀를 모델로 설정하였습니다. 나이 많은 라이스는 코린트 출신으로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살았던 여성이며, 나이 어린 라이스는 기원전 422년에 시칠리아에 거주했던 여성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라이스는 두 명의 실존인물을 모방한 창녀인데, 빌란트는 그미를 자유로우며 교양을 갖춘 미모의 고대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라이스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티포스는 실존 인물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을 정도로 상상력에 의존한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리스티포스는 계몽주의를 표방한 탁월한 식견을 지닌 인물인데, 특히 세계시민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냅니다. 물론 아리스티포스의 삶과 문헌에 관해서는 역사적 고증에 의해서 명징하게 전해 내려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호라티우스, 키케로, 플루타르코스 그리고 아테나이오스 등의 문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아리스티포스에 관해서 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리스티포스는 역사적으로 아테네와 아이기나에서 철학을 가르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리스티포스는 북 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키레네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성장하였습니다. 빌란트의 소설에서 첫 번째 편지를 쓸 무렵 아리스티포스의 나이는 25세였습니다. 당시는 기원전 404년이었고, 95 번째의 올림픽 경기가 치러지던 시점이었고,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4년 전이었습니다. 그 후 마지막 편지를 쓸 무렵은 아리스티포스의 나이는 56세였습니다. 아리스티포스가 시라쿠사 왕궁을 지배하던 디오니시우스 2세의 폭압 속에서 사망했다고 하는 설을 감안하면, 작가 빌란트는 기원전 404년에서 356년 사이의 지중해의 지역을 배경으로 삼은 게 분명합니다.

 

빌란트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주인공 아리스티포스라는 인물에 자신이 갈구하는 인간형을 반영하였습니다. 아리스티포스는 이성적이고, 완전히 체계를 갖춘 인물로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정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고결한 인간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삶 자체를 애호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방종에 빠지지 않는 세계시민이야 말로 빌란트가 갈구하는 이상적 인간형의 모습이었습니다. 빌란트는 아리스티포스 외에도 아름답고 교양 넘치며 차가운 창녀, 라이스를 통해서 냉정한 인간적 면모를 묘사하였습니다. 라이스는 자의식을 지닌 해방된 여성입니다. 어쩌면 그미는 페미니스트의 선구자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작품에서 라이스는 아리스티포스와 조우하고 그를 사랑했지만, 결국 그를 떠나 어느 야심만만한 젊은이를 자신의 반려로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이자는 그미에게 경제적으로 이득을 제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 라이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은 우리에게 다음의 사항을 가르쳐줍니다. 즉 적어도 인간의 상상 영역에서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만남과 이별이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빌란트는 아리스티포스의 혀를 빌려서 플라톤의 국가를 논하게 하였습니다. 12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의도적으로 피상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그 이유는 작가가 플라톤이 의도한 유토피아의 근본적인 핵심을 일부러 회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티포스는 플라톤이 서술한 이상 국가로부터 한발 물러나서, 더 이상 플라톤의 논의 자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아리스티포스에 의하면 인간의 미묘한 열광적 정서를 처음부터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플라톤은 인간의 오성만을 고려할 뿐, 다른 감성적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아리스티포스는 플라톤의 국가를 피상적으로 고찰함으로써, 플라톤의 대화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형식적 결함을 은근히 야유하려 했습니다. 하나의 대화가 그 자체 훌륭한 것으로 이해되려면, 대화의 법칙에 합당하게 어느 정도 가상적 내용을 활용하고 이를 용납해야 한다는 게 아리스티포스의 지론이었습니다. 인간적 갈망, 감성 그리고 정서 등이 배격된 대화는 그야말로 교훈만을 도출해내려는 경직된 훈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고 빌란트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서간체 소설이라는 형식은 독자에게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밝히고 독자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강한 지시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리스티포스는 자신의 친구와 애인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렇지만 라이스, 데모클레스, 레아르쿠스, 디오게네스, 클레오니다스, 히피아스, 클레옴브로투스 등은 주인공에게 편지의 답장을 보낼 뿐 아니라, 그들 간에 서로 편지를 교환하고 있습니다. 또한 편지의 답장은 특정인 한 사람의 주장을 얼마든지 상대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합니다. 편지 교환은 단순히 사상의 전달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상 외에도 당사자의 감정을 전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내적 심리를 소통하게 해줍니다.

 

빌란트는 친화력을 발휘하여 아리스티포스의 인간적 면모 그리고 그의 사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아리스티포스는 질서를 준수하고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이성적이고 행복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빌란트는 자신의 사상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인간이야 말로 자신에게 진솔한 올바르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독일 전역에서 낭만주의가 서서히 성하기 시작되던 시점에 빌란트는 다시 한 번 작가로서의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작품의 성공을 은근히 기대한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반응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문우들조차도 이 작품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란트는 아리스티포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을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영지 오스만슈테트에 머물면서 이 작품을 집필할 수 있었다는 데 감사하고 있습니다. 순수한 자연과 아름다운 감정의 충만함 속에서 내 장년의 꽃이 찬란하게 만개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아리스티포스는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내어났습니다. 조용한 자기도취 그리고 즐거운 시골 생활과 정원이 없었더라면, 나의 소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대표작이며, 아가톤의 이야기보다도 더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