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조이메의 "시라쿠스로 향한 도보여행"

필자 (匹子) 2020. 7. 3. 10:56

 

 

 조이메의 초상화

 

 

일찍이 조실부모한 요한 고트프리트 조이메 (Seume, 1763 - 1810)는 어느 후원자의 도움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20세 무렵에 군대에 징집되어, 캐나다로 떠난다. 탈영 후 그는 프로이센으로 귀국하여 프로이센의 병사가 된다. 나중에 조이메는 러시아 대신의 비서로 그리고 괴센 출판사의 Lektor로 일하기도 했다.

 

조이메의 여행기, "시라쿠스로 향한 도보여행"은 부분적으로 비일란트의 잡지 "Neue Teutsche Merkur"에 발표되고, 전편은 나중에 (1803) 책으로 간행되었다. 조이메는 1801년 10월 6일 라이프치히를 출발하여, 1802년 8월 14일 시라쿠스까지 걸어서 여행하였다. (시라쿠스는 시칠리아 섬에 있는 수도이다.) 그러니까 "시라쿠스로 향한 도보여행"은 저자가 도중에 썼던 편지들과 일기 등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 1811년 제 3판을 간행할 때 편집자는 조이메가 생전에, 그러니까 1806년과 1807년에 집필했던 글들을 덧붙였다.

 

이것들은 제 3장 “(경전에 해당되지 않았던) 거짓 성서 (Apokryphen)”라는 제목을 띄고 있는데, 이전에 발표된 여행기와는 직접적 관련성을 띄고 있지는 않다. 작가의 모험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삶은 "시라쿠스로 향한 도보여행" 뿐 아니라, 동북 유럽 여행기 "나의 여름 1805" (1806), 미완성 자전기 "나의 삶" (1813)에서 잘 기술되고 있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 오로지 예술과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면, 조이메의 작품 속에는 정치적 관심을 지닌 작가의 이탈리아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 (현재의 비참한 삶, 과거의 찬란했던 문화 등)가 담겨 있다.

 

조이메의 도보 여행 (출발: 라이프치히, 비인, 베니치아, 로마, 나폴리, 시라쿠스 그리고 귀향 길: 마일란트, 쮜리히, 파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은 “여행”과는 거리가 멀다. 조이메는 나폴레옹 이후의 이탈리아의 비참한 정치 경제적 상황, 교회와 세속 제후들의 횡포 등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조이메는 혁명가도 아니었으며, 전제 정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봉건주의자의 무능력을 열정적으로 비난하였다. 봉건 군주들은 전혀 깨끗한 거리, 범죄 없는 땅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재화를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이메는 비참한 현재 상황에 대한 근본적 원인을 무엇보다도 “나폴레옹 그리고 부패한 가톨릭 수사 사이의 밀약”에서 찾고 있다.

 

조이메는 동시대 이탈리아 여행자들과는 달리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고대 예술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에게는 고대의 예술이 아니라, 눈앞에 전개되는 올리브 나무와 밀 들판이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성스러운 사물들로 비칠 뿐이다. 가령 조이메는 농부들의 타작기 소리를 “가장 훌륭한 경제적 음악”이라고 명명했다. 실천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계몽주의자, 조이메에게는 값비싼 경비를 들여 교회 건물을 건립하는 짓거리가 “불필요한 낭비”로 여겨졌던 것이다.

 

조이메는 여행기 형식으로서 서한체를 택하고 있다. 서한체를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관찰과 성찰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연결시키고, 편한 마음으로 생각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있다. 조이메의 글이 나중에 서한체 소설 내지는 수필 장르의 모범으로 작용한 것은 어떠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