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2) 클라이스트의 '깨어진 항아리'

필자 (匹子) 2019. 6. 18. 10:09

(앞에서 계속됩니다.)

 

8. 작품의 줄거리 (4) 이때 브리기테 부인이 결정적 증거물을 들고 법정에 나타납니다. 부인은 이브의 창 밑에 찍힌 퉁퉁 부은 발의 발자국을 말했을 뿐 아니라,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가발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법률 고문관이 판결을 독촉하자, 당황하던 아담은 황급히 루프레히트에게 유죄를 선고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브는 마침내 큰소리로 “항아리를 깬 범인은 바로 재판관 아담이야.” 하고 소리칩니다. 이때 아담은 쏜살같이 도주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붙잡지 못합니다.

 

이브는 발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오 하늘이여, 사악한 인간이 어찌 날 속였는지요./ 끔찍한 술수를 사용하여 그는/ 나의 심장을 괴롭혔어요. 그날 밤/ 루프레히트의 서류를 내밀었어요./ 거짓된 진단서가 그를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걸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기어들었어요,/ 내 방으로. 서류를 완성한다는 핑계로./ 아, 여러분 그렇게 끔찍한 걸 요구하다니./ 처녀의 입으로 어찌 그 짓거리를 발설할 수 있을까요?” 발터는 루프레히트를 동인도로 징집하려는 문서가 위조된 것임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이브에게 전해 줍니다. 서기 리히터는 아담을 대신하여 재판장이 되고, 루프레히트와 이브는 모든 오해를 풀게 됩니다.

 

 

깨어진 항아리 연극 공연의 한 장면

 

9. 작품의 패러디 (1): 첫째로 「깨어진 항아리」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문학적으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퉁퉁 부은 발을 지니고 있습니다. “퉁퉁 부은 발”은 그리스어로 “외디포스 οίδίπος”인데, 이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연상시킵니다. 소포클레스의 극작품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집요하게 밝혀나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친아버지를 살해하고, 친어머니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라에르테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스카테와 결혼한 뒤 어머니와 살을 섞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오스카테는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나중에야 비로소 자신이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의 운명 및 운명대로 살아간 자신을 돌이켜본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찌르고, 딸 안티고네의 부축을 받으며, 고행의 길을 떠나지 않는가요?

 

10. 진리를 은폐하려는 가해자인 재판관: 오이디푸스에 비하면 클라이스트 작품의 주인공, 아담은 자신이 저지른 범행을 처음부터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태를 모면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은폐하려 합니다. “깨어진 항아리”는 이브의 처녀성을 상징합니다. 아담은 이브의 방에서 이브의 성을 탐하려 합니다. 이브의 성이 정말로 유린당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물음은 작품의 주제를 논할 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담이 이브의 사랑을 탐하다가 그만 항아리를 깨뜨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한 아담은 (이브의 성을 탐하려던) 가해자이자 동시에 항아리를 깨뜨린 범인인 셈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어디론가 도주하게 되고, 어느 누구도 아담의 죄를 물을 수 없게 됩니다.

 

11. 작품의 패러디 (2). 둘째로 깨어진 항아리는 성서의 「창세기」를 문학적으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라는 등장인물을 생각해 보세요. 게다가 사법 고문관 발터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관장하는 verwalten” 사람이고, 서기의 이름은 “빛을 밝히는 자 Lichter”로 명명되어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작품에는 속담, 성서, 고전 작품 등에서 많은 문구들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담은 이브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었는데, 판사 아담은 이와는 달리 처녀 이브에게 음욕을 품고 접근합니다. 그러다 루프레히트에 쫓기면서 상처를 입습니다. 이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죄의 몰락과 관련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천국의 뱀으로부터 선악과를 얻어, 그것을 먹은 뒤부터 천국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깨어진 항아리 - 그것은 바로 처녀성을 상실한 한 여성을 상징할 수도 있다. 사진은 겁탈당한 젊고 아릿따운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2. 깨어진 항아리의 상징성: 따라서 우리는 「깨어진 항아리」의 주제를 상기한 내용과 관련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깨어진 항아리는 그밖에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항아리는 그 자체 하나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깨어져버렸습니다. 따라서 깨어진 항아리는 그 자체 진리 발견의 어려움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진리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과연 누가 항아리를 깨뜨렸는가? 품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가발을 쓴 아담은 진리를 은폐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이렇듯 올바른 과거를 재구성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재판관 아담의 욕망은 지극히 우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입니다. 재판 시 어느 무엇도 물적 증거로 채택되지 못합니다. 오로지 이브의 외침만이 결국 아담의 범행을 백일하에 드러나게 해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역사적 인과론 내지는 소포클레스가 말하는 신의 섭리 등을 거부하고, 오로지 인간 삶이 무엇보다도 우연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이와 관련하여 클라이스트는 “죄악도 신의 뜻”이라는, 이른바 신정론 (神正論)을 배격할 뿐 아니라, 사필귀정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든 인과율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13. 작품의 문체의 특성: 클라이스트는 오해, 단절, 찢겨진 문장 등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언어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클라이스트에 의하면 언어는 사실 내지 특정한 진리를 밝혀주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이를 방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슈로펜슈타인 가 (家)」에서 거론되고 있듯이- 의사소통의 기본 요소가 아니라, 소통을 방해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담은 말로써 자신의 범죄를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볼아갑니다. 이 점에 있어서 클라이스트의 극작품 「깨어진 항아리」는 어떤 계몽적인 결말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즉 인간은 클라이스트에 의하면 더 이상 신의 섭리라든가 인과율이라는 운명의 사슬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다만 우연일 뿐입니다.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비극적 확인을 아담이라는 일견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통해서 보여준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