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서로박: 브레히트의 연극을 위한 작은 오르가논

필자 (匹子) 2019. 3. 31. 14:08

 

베르톨트 브레히트 (B. Brecht, 1898 - 1956)의 「연극을 위한 작은 오르가논 (Kleines Or- ganon für das Theater)」은 1949년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1939년부터 집필한 "놋쇠 구입" 작업의 일환으로서 연극과 극예술에 관한 대화를 완성하지 못했는데, 평소에 이를 보완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본고에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오르가논”에 실린 77개의 경구적인 글에 착안하여) 연극에 관한 브레히트 자신의 구상이 담겨 있다.

 

감정 이입이라는 자연주의적 원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극 이론과 일맥 상통하고 있는데, 브레히트에 의하면 파시즘의 죄악을 지적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부르주아들이 “마약 판매”로 재화를 벌면서, 사람들을 마약으로 중독시키듯이] 독자나 관객의 비판력을 마비시킨다고 한다. 극작가는 [인간적 사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미학적 모사로 원용해야 한다.

 

베이컨은 새로운 가치 원칙을 다음과 같이 변증법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오직 자연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자만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브레히트는 자신의 새로운 예술 원칙을 다음과 같이 모순적으로 밝힌다. 즉 모사 행위는 모사된 것의 뒷전으로 물러나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미적 표현 형태는 현재의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며, 미학에서 유래하지는 않는다. 예술은 (학문적 실험과 유사하게) 현실에 대한 미적 직관의 모델을 설계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델은 (현실로부터 벗어난) 고유한 세계를 축조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실제 양태에 의해서 조직화된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미적 직관의 모델은 아름다움과 무관한 현실을 그대로 (꾸밈이나 과장 없이) 보여줄 수 밖에 없다. 브레히트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의 억압 구조 내지 모순성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과업이었다.

 

여기서 브레히트가 강조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현실 모델을 가급적이면 진실되게 제시하려는] (극작가의) 학문적 태도는 예술적 태도와 궁극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교훈적 (계몽적) 의향은 반드시 “즐거움과 편안함의 영역”으로부터의 완전한 추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연극은 유희의 장소로 머물러야 한다. 학문이 인간의 보다 나은 삶에 몰두하듯이, 예술은 유희에 몰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과 예술은 “한결같이 인간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작은 오르가논의 후기」는 브레히트의 베를린 연극 작업의 결과를 요약한 것이다. 브레히트는 여기서 서사극의 개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서사극의 개념은 (“연극”의 개념과 일견 경직될 정도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언제나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브레히트는 레닌과 함께 제반 모순들을 공개적으로 무대 위에 올릴 것을 호소한다. 이에 비해 시민극에서는 현실적 모순들이 수박 겉핥기식 조화로움 속에서 은폐되고 치장되지 않는가? 서사극이 목표로 하는 것은 브레히트에 의하면 모든 예술로 하여금 삶의 예술에 기여하게 하는 일이라고 한다. 삶이란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은 오르가논」은 1949년 브레히트의 "억척 어멈과 그 아이들"의 공연과 관련하여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프리츠 에르펜벡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브레히트의 입장을 공격한 반면에, 파울 릴라와 볼프강 하리히는 브레히트의 예술과 실험 정신을 옹호한 바 있다. 브레히트가 언제나 교훈적이자 계몽적 의향을 즐거움의 의향과 합치시키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30년대만 하더라도 극작가는 향락과 유희를 위한 연극을 매도하였다. 그러나 40년대 말에 브레히트의 이러한 입장은 변모를 거듭한다.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의 문화 정책 그리고 변화된 유럽 현실은 그로 하여금 예술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향락 내지 유희의 입장을 수용하게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