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카를 포퍼의 유토피아 이론 비판

필자 (匹子) 2021. 4. 22. 11:46

카를 포퍼 Karl Popper는 19세기 이후에 폭력을 행사한 국가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첫째로 국가는 혈통, 민족 그리고 인종을 따지므로 그 자체 최상의 목표가 될 수 없다고 한다. 둘째로 국가는 오로지 갈등과 전쟁을 통해서 존속되어 왔다고 한다. 셋째로 국가는 스스로 도의적 의무를 지니지 않고, 개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봉사하고 기여하도록 강권할 뿐이다. 

 

넷째로 국가가 추구하는 최상의 재산은 오로지 전쟁, 운명 그리고 명성에 불과하다. 다섯째로 국가의 모든 일은 지도자 내지 위인의 창의적 역할을 통해서 수행되어 왔고 인민의 의지는 거의 무시되었다. 여섯째로 국가가 중시하는 것은 소시민들의 개별적인 삶이 아니라, 국가에 기여하는 영웅적 삶 내지 영웅의 운명이다. (Popper 1980: 85 – 97).

 

국가 비판과 관련하여 포퍼는 유토피아를 어느 특정한 사회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을 설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유토피아는 그 자체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거기에 어떤 규범적인 목표가 설정되는 순간, 그것은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을 설계하는 노력은 궁극적으로 폭력을 동반하지 않으면 실천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퍼의 이러한 견해 속에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파시즘과 볼셰비즘의 ‘사악한’ 정신을 철저히 부정하려는 세계관이 내재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사회 기술의 부속품 내지는 부분품이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즉 포퍼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견해들, 즉 어떤 이상 사회에 대한 규범적이자 초역사적인 설계 (Platon) 그리고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에 관한 구상 (Marx)을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퍼는 사회 혁명을 부르짖지 않고, 점진적인 사회 개혁 및 현 체제의 기술 발전을 내세운다. (Popper, 47/8: 213). 사회 정책은 윤리적인 방향 설정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방향 설정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윤리적 미래주의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어진 경우에 따라 case by case” 사회적 모순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포퍼에 의하면 현실주의자는 한 사회에 나타날 수 있는 거대한 불행을 예방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이상주의자는 최고의 선(善)을 이 땅에서 구현시키려고 애를 쓴다고 한다.

 

포퍼는 사회적 실험을 통해 이룩해야만 하는 점진적인 개혁을 강조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실제에 있어서는 “한 아이가 우물에 빠진 뒤에야 비로소 우물을 폐쇄하는”, 이른바 사후 약방문과 같은 역할을 담당할 것 같다. 왜냐하면 자연 과학에서의 반복적인 실험을 통하여 한 사회가 피할 수 있는 난관을 미리 선취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 사회를 변혁시키는 사건들은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기 전에 이미 발생하거나 지나가 버린다. 

 

둘째, 모든 예견이란 -설령 그것이 나중에 사실로서 판명된다 하더라도- 자기 성찰의 과정을 통하여 과학적 진보 속으로 혼입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모든 예견은 인간의 자기 인식의 과정을 거쳐, 예견이 속출했던 상황을 극복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나오게 된 제반 조건들을 역사적 과정 속에서 쓸모없는 형태로 변화시킨다. 이는 포퍼의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주의란 역사학에서 언급되는 전문용어가 아니라, 과거의 선하거나 추악한 범례를 바탕으로 미래를 진단하고 예견하려는 제반 입장을 통칭하는 입장이다. 포퍼의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객관적인 타당성을 지닐 수 없다. 즉 사회적 변화에 수반되는 제반의 사회적 문제점들은 오직 “시도나 오류 trial and error” 라는 검증 방법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비판하는 포퍼의 발언은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과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로서 대변되는 우파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오직 유럽 사회에만 해당될 것 같다. 그것은 제 3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수렴하고 있지 않다 (Améry 71: 84). 

 

실제 포퍼는 2차 대전 후부터 유럽의 국가가 못사는 나라를 착취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은폐시키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서 횡행하고 있는 반 유토피아의 경향은 잘살게 된 유럽인들이 더 이상 개혁이나 혁명을 통한 사회적 변화를 원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데에 근거한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부자가 된 의적이 정의의 피로 물든 칼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것을 땅속에 감추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논리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상적 사회 설계를 선취하려는 행위를 거부하는 모든 반 유토피아의 자세는 결국 지배체계에 동조하는 데에 활용될 수밖에 없다.

 

참고 문헌:

- Améry, Jean (1971): Gewalt und Gefahr der Utopie, in: ders., Widersprüche, Stuttgart, S. 79 - 100.

- Popper, Karl (1965): Das Elend des Historizismus, Die Einheit der Gesellschftswissenschaft, Bd. 3, Tübingen.

- Popper, Karl (1980): Die offene Gesellschaft und ihre Feinde, Bd. 2. Tübingen, S. 80 –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