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 비판

필자 (匹子) 2021. 3. 21. 09:21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21세기의 현실을 고려하면서 유토피아를 비판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월러스틴에 의하면 토마스 모어에서 비롯하는 유토피아의 사고를 파기하고, 그 대신에 “유토피스틱스”의 사고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세계 시스템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은 원론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그의 전문용어는 어떤 하자를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유토피스틱스”는 근본적으로 고찰할 때 유토피아와 동어반복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월러스틴에 의하면 없는 장소로서의 종교적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때때로 정치적 단합이라는 공동적 행위를 위해 활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토피아의 요구 사항은 정치적 실천의 과정에서 정반대로 전복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유토피아는 어떤 환상을 추적하므로, 나중에 어쩔 수 없이 환멸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게다가 유토피아는 월러스틴에 의하면 복수 내지 보복과 같은 끔찍한 척결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곤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감지할 수 있다. 즉 월러스틴은 전통적 유토피아를 마르크스주의의 임장에서 수용하여, 그것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관점은 엥겔스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유토피아의 배경이 되는 현실적 조건을 각자 달리 고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엥겔스는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산업 중심의 현실적 토대 내지 아직 무르익지 않은 혁명적 조건을 투시했지만, 월러스틴의 관심사는 21세기의 세계의 정황이다.

 

어쨌든 유토피아는 월러스틴의 경우 “주관적 꿈의 결과로 낙인찍힌 무엇”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월러스틴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인간의 꿈을 어떤 일탈된 종교적 이념의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 이로써 유토피아는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자행되는 테러 행위로 평가 절하되고 있다, 나아가 월러스틴이 유토피아를 종교적 기능 속에 편입시킨다면, 그는 유토피아를 근본적으로 천년왕국설과 종말론 등의 사고와 혼동하는 셈이다. 

 

게다가 월러스틴이 유토피아에서 극단적 폭력으로서의 테러를 도출해내는 방식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합리적이다. 그것은 카를 포퍼에게서 드러나듯이 작위적인 인상을 풍긴다. 왜냐하면 월러스틴의 논조는 다음과 같은 의혹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종교, 종말론, 신화 그리고 신앙과 관련된 어떤 합리적 세계관조차도 얼마든지 끔찍한 악행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남용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세계 평화를 갈구하는 고결한 문장. 이는 베르길리우스의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비롯된 것인데 임마누엘 칸트가 "세계 평화론"에서 인용한 바 있다. Furor impius intus - fremit horridus ore cruento. 내부에는 저열한 전쟁광기기 날뛰고, 피의 복수 행위와 함께 끔찍하도다.

 

월러스틴은 유토피아를 대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유토피스틱스”를 내세운다. 이것은 미래의 사회를 전제로 할 때 역사적 선택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사고라고 한다. 그것은 막스 베버가 언급한 바 있는 “가능한 역사 시스템의 물질적 합리성”에 대해 우리의 판단력을 적용하는 사고로 이해된다. 문제는 인간 사회의 시스템을 냉정하고 리얼한 관점에서 평가하는 작업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어떤 완전한 필연적 사회가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가능한, (불확실하지만) 더 나은 무엇으로 판명되는 미래가 어떠할까? 하는 물음이라는 것이다. 유토피스틱스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마지막 결론은 형식 논리적인 합리성의 바탕에서 추구하는 목표를 위한 최선의 수단의 선택으로 소진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방된 능동성의 관점에서 사회적 정의에 대한 실천 내지 이를 평가하는 작업으로 끝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유토피아와 유토피스틱스가 기능적 측면을 고려할 때 이질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가 비록 유토피아의 사고를 거부하면서 21세기 현대 사회의 난제를 진단하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유토피아의 개념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월러스틴이 사회적 정의에 대한 실천 내지 이를 평가하는 작업을 관건으로 생각했듯이 토마스 모어 역시 사회적 정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유토피아의 사회 비판은 (월러스틴 또한 강조한 바 있는)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 상황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로 삼고자 하는 바는 자본주의의 글로벌 세계 시스템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토피아의 개념이 기능적 측면을 고려할 때 유토피스틱스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월러스틴은 자본의 축적이 최상의 가치로 인정받는 글로벌 세계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토마스 모어 역시 자본주의의 토대가 굳건하게 다져지는 시기의 사유 재산제도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두 사람이 처한 현실적 조건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평등한 삶은 파기되어 있고, 개개인은 세계의 정세 및 변화에 들러리로 전락해 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이윤추구의 욕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는 어떠한 그럴듯한 규범적 자치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세계는 종국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패망하리라고 확신하는 반면, 모어는 미래의 결과를 명시적으로 예견하지는 않았다. 전자는 하층 계급의 사회적 연대에 기대를 거는 반면에, 모어는 절제된 삶, 경제적 평등을 도모하는 세상의 질서에 기대감을 드러내었다. 그렇다면 하층민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의 세계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으며, 사회 경제적 대안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집결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월러스틴의 방안은 추상적 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월 러스틴, 이매뉴얼: 유토피스틱스, 백영경 역, 창작과 비평사 1999.

- Wallerstein, Immanuel: (독어판) Utopistik. Historische Alternativen des 21. Jahrhunderts. Wien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