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블로흐가 파악한 기독교 속의 유토피아 (2)

필자 (匹子) 2017. 1. 15. 12:04

6. 이웃 사랑이 실천되는 나라: 다시 블로흐의 논의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꿈꾼 세상은 이웃 사랑, 즉 박애가 실천되는 나라였습니다. 당시에도 부자는 가난한 자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로마의 권력자는 힘없고 돈 없는 사람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빈부의 차이, 계급의 차이가 온존하는 세상을 올바른 세상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세상이 차제에는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 변화를 은근히 갈구한 것은 당연합니다. 기독교신앙은 블로흐에 의하면 교인들이 소외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나라를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나라는 한마디로 이웃 사랑이 실천되는 나라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제각기 미립자와 씨앗들로서, 조화로운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영겁의 시간Äon”을 갈구하는 존재들입니다. 개별적 존재는 모두 씨앗들로서 서로 아우르며 평등하게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공산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평등한 나라를 방해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예수의 묵시록의 신앙 역시 이러한 비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인위적인 혁명을 시도하거나 직접적으로 희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세상은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끔찍한 파국에 의해서 몰락을 맞이하리라고 처음부터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기존하는 세계의 몰락은 그리스도의 눈에는 차제에 나타날 자연스러운 결과로 비쳤습니다. 블로흐가 예수 그리스도를 묵시록에 바탕을 둔 은폐된 신Deus abscontitus”, 다시 말해서 오메가의 인간신으로 규정하는 까닭도 이와 관련됩니다.

 

7. 신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다: 예수가 의미하는 신의 나라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박애의 사상에 근거한 공동체의 나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목표로 삼는 것은 블로흐에 의하면 결코 내면이나 내세가 아닙니다. 예수는 신의 나라는 너희들의 마음 에 있노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는 신의 나라가 너희들과 함께 있노라하고 말하였습니다. (루카의 복음서17. 21). 더욱이 예수는 이 말을 바리새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신의 나라에 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신의 나라는 이미 예수를 추종하는 바리새인들과 함께 선택받은 공동체로 건립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블로흐는 신의 나라를 결코 보이지 않는 명상적인 곳이 아니라, 하나의 개혁적인 사회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8. 주어진 현실의 변화로서의 새로운 탄생: 예수는 우리 신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요한의 복음서1836절에 실려 있는데, 요한에 의해서 조작된 것입니다. 요한이 그렇게 조작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법정에서 피해당하지 않으려고 의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비겁하게 저 세상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수정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현실과 무관한 하늘나라를 강조했더라면, 이는 그 당시 이 세상저 세상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에 위배됩니다. 물론 신의 나라는 고대 오리엔트의 점성술적 종교적 사색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그렇지만 블로흐는 신의 나라를 주어진 현실과 관련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시대 구분을 통한 세계에 관한 이론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이며, “저 세상은 미래의 여기에 존재하는 시간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개념은 지정학적으로 이곳, 저곳으로 대립되는 게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같은현장에서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그러한 개념입니다. (블로흐 2004: 1015).

 

9. 가난한 기독교인들의 독자적인 나라: 저 세상은 인간이 바라는 지상이며, 그 위에 이상적 천국이 존립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발언과 주제 상으로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보라, 나는 어떤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창조하리라. 사람들은 지난 세상을 더 이상 기억하려 하지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이사야65. 17). 인간이 애타게 기리는 것은 죽고 난 뒤에 천사들이 노래하는 피안의 세상이 아니라, 바로 지상의 어떤 새로운 나라, 다시 말해서 지상의 기존 질서를 뛰어넘는 사랑의 나라일 뿐입니다. 그래서 블로흐는 원래의 초기 기독교의 공동체를 다른 나라로부터 둘러싸인 어떤 독자적인 나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저 세상의 나라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뒤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내면의 세계내지 죽은 뒤의 저세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예수의 사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빌라도와 네로조차 이미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지배 계급은 기독교에 내재한 사랑의 공산주의를 가능하면 인간 내면을 가꾸는 신앙으로 그리고 내세의 영원한 행복을 갈구하는 신앙으로 왜곡 해석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일반 대중이 느끼는 혁명적 긴장감을 완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10. 자연스럽게 파국을 맞이할 이 세상의 나라: 그렇지만 이 세상의 나라는 예수에 의하면 악마의 나라였습니다. (요한의 복음서8. 44). 그렇기에 예수는 이 세상을 계속 존속시켜야 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과 한 번도 불간섭의 계약을 맺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나는 평화를 선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의) 칼을 선사하려고 이곳에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마태오의 복음서10. 34). 그러나 예수는 처음부터 원칙적으로 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에서 표명된 무기의 거부는 은총을 빌 때마다 천국의 나라를 이룩하게 된다.”는 주장과는 성질이 다릅니다. (마태오의 복음서5. 310). 예수가 처음부터 무기를 거부한 까닭은 블로흐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거대한 혁명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위적인 살상 행위가 불필요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블로흐 2004: 1017). 예수 그리스도는 묵시록의 내용을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무고한 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기존 사회의 거대한 전복은 필수적으로 나타난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만간 자연과 우주가 하나의 끔찍한 파국을 맞게 됨으로써, 사회는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설교는 자신이 설파한 어떠한 윤리적인 말씀보다도 더 앞서는 중요한 사항입니다.

 

11. 우주의 파국은 도래할 것이다: 묵시록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모든 윤리적 계명을 규정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예컨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당한 것처럼, 그렇게 채찍질을 당하며 사원에서 쫓겨날 뿐 아니라, 온 국가와 사원이 끔찍한 파국에 의해서 순식간에 허물어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묵시록의 전언을 담고 있는 마르코의 복음서13장은 신약 가운데서도 가장 신빙성 있는 단원입니다. 만약 이 대목이 없었더라면, 산상수훈에 나타난 유토피아는 결코 정확하게 이해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현재의 시간이 끝나고 있다고 보았으며, 조만간 우주의 파국이 도래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예수는 왕에게 속하는 것을 왕에게 주고, 신에게 속하는 것을 신에게 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루카의 복음서: 2025). 이 말을 통해서 예수는 도래할 파국을 생각하며 국가에 대한 자신의 경멸감을 표명하였을 뿐, 사도 바울이 말한 국가와의 타협 의사를 표시한 것을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