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블로흐가 파악한 기독교 속의 유토피아 (1)

필자 (匹子) 2017. 1. 13. 21:07

1. 혁명적 선취의 상으로서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 이 장에서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기독교 사상과 유토피아 사이의 접목 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신론자인 에른스트 블로흐가 파악한 기독교 사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유토피아로 논의를 제한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신앙인이 아니라, 기독교의 밖에서, 다시 말해서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기독교와 유토피아 사이의 관련성을 가장 명징하게 지적한 학자가 블로흐라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독교 사상은 블로흐가 1910년대에 자신의 연구 대상의 확장의 일환으로 접한 영역에 불과했습니다. 예컨대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자유의 나라의 구체적인 범례였는데, 이것이 공교롭게도 원시 기독교 교회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블로흐는 사상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거의 지속적으로 폐쇄적 자세로 연구대상과 연구 영역만을 중시하는 신학자 내지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비난당해 왔습니다. 어쨌든 블로흐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기능과 영향이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예수 그리스도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는 하나의 모델 내지 정태적 구도로 설계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오래 전부터 애타게 갈구하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남아 있는 혁명적 순간의 상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기독교 사상에서 언급되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는 블로흐에 의하면 사회 유토피아가 아니라, 종말론의 모티프를 선취해주는 무엇입니다.

 

요약하건대 블로흐는 빌헬름 바이틀링Wilhelm Weitling이 추구한 바 있는 기독교사상과 사회주의를 합금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Schäfer: 19). 오히려 사회주의의 토대 하에서 기독교에 내재해 있는 사랑의 공산주의를 하나의 범례로 언급했을 뿐입니다.

 

2. 예언자들의 저항과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 성서만큼 유목생활과 같은 아직 불안전한 원시 공산주의적 체계를 강렬히 지닌 책은 없습니다. 블로흐는 구약성서의 가나안의 삶을 묘사하며, 예언자들의 저항과 구세주에 대한 그들의 기다림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컨대 구약성서 가운데 「출애굽기」는 블로흐에 의하면 가장 놀라운 해방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기대했던 새로운 땅, 가나안은 과거에 모세가 약속했던 천혜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찬란한 유토피아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착취의 상황 속에서 예언자들은 마치 천둥처럼 나타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에 대항하였습니다.

 

바로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지 않고 고립된 채 살아가는 나지레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나안의 풍요로움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하며 오래 전의 신, 야훼를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가나안의 신, 바알에서 유래하는 지배자 교회의 물질 만능주의를 증오하였습니다. 만약 해방의 정신이 다시 생기를 지니게 될 그날이 오면, 사람들은 야훼신의 도움으로 사회주의의 풍요로움 속에서 찬란하게 살아가리라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러한 식으로 천년왕국을 꿈꾸었습니다.

 

 

3. 극적인 탄생과 극적인 죽음: 바로 이러한 기대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습니다. 가장 고귀한 생명, 아기 예수는 추운 겨울날 말구유에서 탄생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로마의 총독으로부터 위험한 인물로 낙인 찍혀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33세의 나이에 처형당했습니다. 신학 연구에 의하면 예수는 추측컨대 아우구스투스 황제 통치의 시기에 나사렛에서 태어났으며, 기원후 3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론하고 있습니다. (타이센: 234, 242).

 

어쨌든 이 세상의 어떠한 종교 창시자도 예수처럼 찬란한 광채에 휘덮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이처럼 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만큼 놀랍고도 극적인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 “야훼”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은 다른 한편으로는 히브리어로 “야샤”. 즉 “구원” 내지 “조력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가 탄생한 연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기원전 2세기 내지 3세기에 활동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4. 인간 신, 예수: 블로흐는 예수를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즉 예수는 영생을 누리는 성부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그는 모든 권능을 지닌 채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규정하는 전지전능한 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인간의 근본적 존재가 의인화되고 대상화된 이상으로 출현한 분입니다. 신의 엔텔레케이아는 어쩌면 어떤 인간의 내면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Flasch: 32). 특히 에크하르트 선사Meister Eckhart의 “신관 神観”에서 인간신의 보편적 양태가 발견될 수 있습니다.

 

에크하르트 선사는 성령의 정신이 신앙을 통해서 신자에게 신비적 결합으로 이전된다는 사실을 설파했습니다. (이준섭: 112 이하). 신은 정태적인 인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으로서 이를테면 “하는 님” (尹老彬)과 동일합니다. 그분은 잘게 쪼개진 “개인Individuum”이 아니라, 사람들을 함께 아우르게 하는 “큰 자아 Atman”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웃 사랑을 설파하고,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적 유토피아로서의 “하늘나라”의 핵심적 의미 역시 이와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5. 인간의 고향으로서의 하늘나라: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립된 존재로 살아가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우뚝 서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기대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난 직후부터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부모의 보살핌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의 교육을 통하여 인간은 약 서른의 나이에 입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함께 아우르며 살아가는 생명체라고 말입니다.

 

함께 아우르며 협동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고려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다르게 수용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협동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종말론적인 한 울타리, 즉 “한울나라”에서 어떤 마지막 고향을 찾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블로흐 역시 죽은 뒤의 저세상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의미를 발견하였습니다. 철학자, 윤노빈은 이러한 의미에 서로 아우르며 돕는 인간의 삶의 태도 내지 울력의 자세를 첨가하여 인간이 지향해야 할 유토피아를 “한울나라”로 명명하였습니다. (윤노빈: 327). 특히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가 불사의 존재, 죽지 않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신과 같은 지고의 의미를 가르쳐준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을 인간신으로 격상시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