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서로박: 파이어스톤의 급진적 페미니즘 이론

필자 (匹子) 2022. 4. 12. 09:34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은 『성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Sex』(1970)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이분법, 특히 생물학적 노동의 구분은 사회적으로 끝없이 차별을 재생산해내는데, 이것이야 말로 남성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 경제적 계층차이를 강화시키게 작용한다.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태도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약탈을 가능하게 하고,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잉태한다. 나아가 그것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무책임한 죄를 저지르게 하는 근본이다. 성의 불평등은 오랜 역사에서 나타났으며, 심지어는 동물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하나의 억압 기제와 같다. 흔히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 수컷과 암컷 사이의 불평등을 우주적으로 나타나는 불가피한 억압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이러한 성의 불평등을 제거해나가지 않으면, 인류의 존망을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다.

 

파이어스톤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보다도 더 급진적인 변증법을 내세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이어스톤의 견해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출현한 경제사의 과정을 언급할 때 역사적 변증법의 하위 구조 속에 도사리고 있는 성의 문제를 중요한 것으로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미는 엥겔스와는 달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엥겔스는 남성이 여성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면서, 사유재산의 권리 그리고 일부일처제 가부장주의의 가정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남성 우월의 사고가 존재했다고 말이다. 남성의 지배는 부계중심이든 모계중심이든 간에 생물학적 가족의 결과나 다름이 없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해준다는 미명하게 이들을 억압하도록 작용해 왔다. 파이어스톤의 견해에 의하면 여성이 지배하는 모권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권의 특성이 드러난 경우는 그저 남성의 힘이 미약했기 때문에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가령 여성들은 임신할 경우 언제나 나약함을 드러내었으며, 미성년의 시기는 남자의 보호하는 역할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기 마련이었다.

 

여성과 아이들의 남성에 대한 이러한 의존은 그들의 마음속에 심리적 왜곡을 출현시키게 하여 인간성을 파괴한다. 이러한 왜곡은 프로이트에 의해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그러나 파이어스톤은 프로이트의 사고를 잘못 도출해낸 페미니즘이라고 규정한다. 프로이트의 분석 그리고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은 유사한 점이 많지만 이들의 견해 차이는 다음의 사실에 근거한다. 즉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주의자들은 성의 억압이 결코 변하지 않는 무엇으로 출현하는 사회적 맥락을 용인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의 근원 내지 성 차이는 생물학적 가족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서 파생된다고 생각한다.

 

가령 여성들과 아이들은 아버지인 남자에 의해서 동일하게 억압당한다는 것이다. 가족 내의 젊은 사내아이는 처음에는 억압당하는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고 심정적으로 어마니를 이해하고 그미와 동일시되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두려워하는 아버지의 존재와 동일시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내아이는 근친상간의 금기 사항을 인지하면서 갈등을 느낀다. 이때 그는 성과 감정 사이를 엄밀하게 구분하게 된다. 사내아이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성욕 그리고 사랑 사이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일인데, 이는 결국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의 심리적 토대나 다름이 없다. 젊은 여자아이기 아버지의 권력을 부러워하는 동안에 자신이 결코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만약 스스로 남자다운 강인함을 내세워 노력하면 남성적 권력을 그저 간접적으로 조금 물려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여성과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생물학적 가족 내에서 억압당하게 되는데, 외부적으로, 다시 말해 산업 사회 속에서 다시금 이중적으로 억압당하게 된다. 가부장주의의 핵가족을 생각해 보라. 그들 가족은 다른 가족으로부터 다시 고립되어 살아간다. 유년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배워온 아이들은 의무적으로 학교를 다녀야 한다. 이는 아이들을 더욱 고립시키게 하고, 경제적 의존도를 연장시키게 한다.

 

흔히 말하기를 사회주의 혁명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여성과 아이들을 어느 정도 해방시켰다고 한다. 이로써 여성과 아이들은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성적 자유를 구가하며, 더 큰 세계에 편입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 차이에 근거한 계급 시스템이 종언을 고해야 생물학적 가정의 종말을 기대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여성들은 파이어스톤에 의하면 인공적으로 임신하게 하는 수단을 통해서 여성들이 지금까지 감내했던 생물학적 종족 보존의 역할을 완전히 끝낼 수 있다고 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사랑은 보존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생활에서 자식을 출산하는 기능이 계속 첨부되어 있다면, 사랑은 남녀 모두를 부담스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가정 내에서 육체적 사랑은 그저 억압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뿐이다. 일부일처제의 가정 내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으며, 문화적 창의성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여성들은 지금까지 심리적으로 차단되었던 감정과의 동일성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들은 지금까지 근친상간의 금기 사항으로 갈등을 느껴왔으므로, 여성을 사랑한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첫 번째 금지된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여타의 여성들을 사랑하는 노력을 마음속에서 억눌려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여성들이 사랑과 성을 서로 연결시키는 기존의 이중 구조의 사고를 필연적으로 계속 견지하는 한에 있어서, 여성들은 결코 성의 혁명을 접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생물학적 가족 그리고 근친상간의 금기 사항을 제거해야만 페미니즘의 혁명은 진정한 이성애의 사랑을 누릴 찬스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발적인 성 관계의 모든 다른 유형을 합법적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파이어스톤은 다음의 사항을 구체적으로 예언하지 않는다. 만약 아이들이 더 이상 생물학적 가정 속에서 친어머니에 의해 태어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아이들을 키울 것인가 하는 사항 말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문제는 다양한 교육 공동체의 설립이 가능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혁명은 사회주의 운동을 뛰어넘을 것이다. 기존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여성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그저 여성의 역할을 확장시켰을 뿐이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여성들은 성의 계급을 파괴시키기는커녕 남성의 세계에 스스로 순응해 왔던 것이다. 페미니즘의 혁명은 “미적 예술적 삶의 양식” 그리고 “기술적 삶의 양식” 사이의 균열을 완전히 없앨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미적 예술적 삶의 양식은 여성성, 직관성 그리고 예술성을 가리킨다면, 기술적 삶의 양식은 남성성, 경험주의, 기계적 범칙을 이해함으로써 행할 수 있는 자연 조절의 행위를 가리킨다. 성의 억압을 종결시키게 되면, 에로스는 해방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문화는 폭넓어지고, 더욱 인간성을 구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외된 노동은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기술 발전을 통해서 인간은 힘든 노동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자유롭게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게 될 것이다.

 

줄리에트 미첼Juliet Mitchell은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했다. 파이어스톤은 프로이트를 잘못 이해했으며,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페미니즘에 잘못 적용했다고 한다. 가령 파이어스톤은 마치 시몬느 보바르처럼 프로이트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거론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카를 구스타프 융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미첼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다. 파이어스톤이 언급하는 유일한 유형은 보편적 경험 혹은 개인의 우연한 경험으로서의 사회적 현실과 직결되는데, 파이어스톤의 작업은 빌헬름 라이히의 그것과 무척 흡사하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관한 파이어스톤의 해석은 미첼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축소시킨 사회적 제반 현실에 대한 프로이트의 심리적 구상에 대한 축소판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이를테면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제반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핵가족의 상태만을 고려한 경우를 생각해 보라. 따라서 파이어스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프로이트의 메타퍼를 가정 내의 구체적 권력 관계에 의거해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미첼에 의하면 특정한 핵가족의 상황 외에도 모세의 신화 속에 확장시켜 해석될 수 있는데, 프로이트 역시 신화적 관계 속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명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로잘린 델마르Rosalin Delmar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파이어스톤은 프로이트에 의해 제기된 문제를 주로 합리적 논점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인간의 예술적 판타지라는 내적인 세계가 등한시되었다고 한다. 파이어스톤은 프로이트를 반박하거나 그의 잘못을 바로잡았다기 보다는 어느 측면을 무시한 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메리 오브라이언Mary O’Brien은 『재생산의 정치The Politics of Reproduction』 (1981)에서 파이어스톤의 문헌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즉 작품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어느 특정한 정황 하에서 축소화시키고 잇는데, 여기에는 생물학이 강조되고 있으며, 역사에 대한 시각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하자로서 오브라이언은 파이어스톤의 문헌 속에 담긴 문체가 거칠다고 지적하였다.

 

인간학을 연구하는 도날드 시몬스Donald Symons는 자신의 책, 『인간의 성의 진화The Evolution of Human Sexuality』 (1979)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태어날 때는 동일하지만,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고유의 경험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마비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에게 사랑의 능력이 결여된다고 한다. 시몬스는 다음과 같은 견해로써 파이어스톤의 입장을 반박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누구든 타인에 대해 어떤 병적인 관점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잔 팔루디Susan Faludi는 파이어스톤이 추구하는 (생물학적 가정의 해체 그리고 근친상간의 타부의 파기를 통한) 사회의 급진적 구조 변혁에 동감하면서도 다른 논의는 별로 새로운 게 없다고 지적하였다. 여성의 자궁 밖에서 출산함으로써 여성을 출산 기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만들자는 파이어스톤의 제안은 당시에는 불가능했으나, 오늘날 병원에서 통상적으로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파이어스톤의 제안은 팔루디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에는 신선한 사고라고 수용되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노여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물론 사람들은 파이어스톤의 글을 읽고 아이의 권리, 남성적 노동에 대한 비판, 전통적 결혼 그리고 사이버네틱이라는 컴퓨터 혁명을 통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 등을 예언적으로 지젹했다는 점에서 찬사를 보냈지만 말이다.

 

참고 문헌:

 

- Firestone, Shulamith: The Dialectic of Sex, New York 1970.

- Mitchell, Juliet: Psychoanalysis and Feminism: A Radical Reassessment of Freudian Psychoanalysis, London 2000.

- O’Brien,, Mary: The Politics of Reproduction, London 1983.

- Symons, Donald: The Evolution of Human Sexuality, Oxford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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