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물질에다가 여러 가지 다양한 특징을 부여했으며, 거기에 의지로서의 세계가 존속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물질은 세상에 유일한 존재도 아니고, 이미 살펴보았듯이 세계의 핵심적 존재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계라는 핵심적 존재가 분명히 드러나기 전에, 쇼펜하우어는 물질 이론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하나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중시하면서 물질 이론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게 중요한 것은 초감각적인 관념론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견지해야 할 지혜이며, 최소한 인식 이론의 마지막 결론이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물질 이론은 이러한 관련성을 넘어서서 모든 게 일차적으로 오로지 그곳에 자리해야 한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나아가 물질 이론은 논의의 중요한 뼈대로서 무엇보다도 인과율의 법칙을 중요한 특징으로 포착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만 물질이 그 자체 ‘영원한 진리verita aeterna’에 해당하는 기존하는 사물의 질서로서 머물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물질 이론은 과감하게도 인과율에 의해서 작동되고 인과율을 내용으로 하는 인간의 오성을 훌쩍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 이로써 예기치 못하게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선결문제 요청의 오류petitio principii’를 가리킨다. 맨 처음에 견지하고 있었던 어떤 가설의 근거가 마지막 시점에 이르러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어 다시 나타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말하자면 인과율의 연결고리 내지 사슬은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물질 이론가는 어쩌면 말을 타고 가다가 물에 빠진 뮌히하우젠 남작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말과 남작은 어떻게 해서든 밖으로 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자신의 발은 마안에 묶여 있는데, 말은 앞으로 향한 그의 머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상기한 방식으로 오로지 관념론 내지 인식 이론의 출발점의 측면에서 물질 이론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물질 이론이란 “논리를 펴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망각하는 주체의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물질 이론은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세계를 오로지 물리역학의 관점에서 편파적으로 협소하게 고찰한 이론으로서, 거기에는 어떤 분명한 아포리아가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물질의 세계는 언젠가 체스터턴Chesterton이 언급한 바 있듯이 스스로 광대한 존재이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협소하여서, 그 안에는 사람의 머리통 하나도 들어설 수 없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사항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즉 쇼펜하우어는 뮌히하우젠 남작의 이야기를 언급할 때 그야말로 무모할 정도로 한 가지 사항을 어설프게 포착하고 말았습니다. 물에 빠진 말과 남작의 이야기는 역으로 자신의 관념론의 활용 방식과는 전혀 반대되는 어떤 놀라운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가령 남작은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댕기머리를 싹뚝 잘라버리는데, 여기서 댕기머리 자체가 주체의 관념론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과 같습니다. 쇼펜하우어의 비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관념론자들이 물질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에 비해 객관적인 물질 이론가들은 자신의 댕기머리에 집착하는 대신에 외부에서 자신의 논의를 위한 여러 가지 중요한 근거를 찾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에게 당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확고한 땅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러한 근거를 구체적으로 활용하는 자들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놀랍게도 직접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 내지는 의지로서의 세계에 관해서 세부적 논의를 개진해나갔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매우 객관적인 무엇을 개진하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 쇼펜하우어의 다른 측면, 가령 핵심적인 의지의 형이상학에서는 어떤 상당히 많은 물질 이론의 논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심지어 지성이라는 개념도 출현합니다. 지성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어떤 사고의 결실로, 그야말로 아주 대단한 “두뇌의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의지의 세계는 전적으로 물질 이론으로부터 화학의 결합 공식의 영역 그리고 동물 세계의 영역 등을 거쳐서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의식이라는 영역으로 상승한다고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상승을 위한 단계를 -주체와는 아무런 관련성을 지니지 않은 채- 의지의 객관성 내지 의지의 객관화 현상으로 해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어떤 두 번째의 물질, 즉 물질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과율의 상과는 다른 무엇입니다. 여기서는 의지와 표상의 공식 대신에 물질이 사물의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쇼펜하우어는 추상적 개념 대신에 직관을 도입한 셈입니다. 그것은 바로 의지에 해당하는 직관입니다. “의지는 인간의 신체로 설명될 수 있다. 이빨들, 목구멍 그리고 창자의 연결통로 등은 그 자체 객관화된 굶주림이다. 그밖에 객관화된 성충동을 포괄하는 생식 기관을 생각해 보라.” 여기서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인간의 육체는 모든 소재와 관련되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파악하는 물질은 바로 이 대목에서 결코 물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물의 어떤 가시적인 무엇으로서 언제나 현상의 세계에 속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는 물질을 현상의 형태에 굴복하고 있는 무엇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물 자체로 이행하는 과정들 (이를테면 세계의 의지)은 분명히 존속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의지는 어떤 일원성, 어떤 전체성, 어떤 실체 그리고 어떤 파괴되지 않는 특성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만약 물 자체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오로지 시간의 얄팍한 면사포 속에서 하나의 의지로 타나난다면, 이러한 의지는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율 등과 함께 교묘하게 가려진 채 물질로 출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물질은 이른바 의지의 세계라는 단계 속에서 마냥 구분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구분은 자연적으로 의지의 객관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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