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링은 1800년 이후로 자신의 초기 사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저서 『철학과 종교』(1804) 그리고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연구』(1809) 등을 통해서 초감각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물질을 더 이상 추종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여기서 더 이상 모든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의식 없는 자연주체가 아니라, 모든 사물의 가장 어둡고 암울한 무엇으로 해명되고 있습니다. 물질은 셸링에 의하면 여러 가지 부수적인 것으로 합쳐진 딱딱한 무엇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신의 이념들이 지상으로 추락하여” 떨어진 결실로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지적 세계라는 최상의 원칙 그리고 유한한 자연” 사이의 지속적 불변성은 완전히 일탈되고 맙니다.
셸링은 깊은 숙고 끝에 실존의 “사실” 속에 자리한 의지의 특성을 하나의 에너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야콥 뵈메가 추적한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존한다는 사실은 역사적 과정의 심연 속에 자리하는 비-합리적인 무엇의 강렬함을 가리킵니다. 물론 셸링은 이러한 비합리적인 무엇을 어떤 근원적인 신의 내부에 설정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무엇은 근원적인 신에 의해 마련된 “근원 근거”라고 명명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근원적 죄악으로서,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근원 근거에 의해서 유한한 무엇으로 나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토대가 없는 신화학의 반대편에는 기이하게도 “첫 번째의 우연적인 무엇 내지 자신과 동일하지 않는 무엇”에 관한 기록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연적인 무엇 내지 스스로와 동일하지 않는 무엇은 물질 내지는 물질의 외부 세계라는 “첫 번째로 주어진 것primum existens”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셸링은 아직 포착되지 않은, 형체 없는, 객체를 지니지 못한 강렬한 물질의 불안 내지 움직임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와 접목시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연적이고 동일하지 않는 무엇, 아직 포착되지 않고, 형체 없는 무엇을 한마디로 형태로 향하는 “물질들의 열망 appetitus materiae”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셸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보다 확장시켜서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즉 물질의 열망이란 “어떤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한 첫 번째 성향”이며, 객체를 탄생시키기 위한 첫 번째 의향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정서적이고 비논리적은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강렬한 병적인 욕망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망은 특히 객체의 존재 내지 물질의 존재라는 첫 번째로 주어진 것 속에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철학사에 관한 셸링의 강연문은 독일 관념론의 잘 알려지지 않은, 가장 깊이 있는 내용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헤겔 조차도 이와 같은 깊이 있는 내용을 자신의 글에 담지는 못했습니다.) 주체를 둘러싼 여러 가지 움직임에 관해서 이렇게 세밀한 방식으로 서술한 문장은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셸링에 의하면 주체는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 휴지 내지는 안정을 거부하고 어떻게 해서든 움직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외적인 무엇을 끌어당겨야 하는데, 주체는 이러한 객체로 화하는 과정 속에서도 전혀 완전할 정도의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 질문,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 속에 자리하고 있는 근본적인 불행한 모순점 등에 관한 문제점을 분명히 읽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셸링의 인용문은 어떤 근원적인 변증법을 예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령 변증법의 과정 속의 날카로운 가시는 존재가 첫 번째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이미 명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체가 느끼는 갈등은 헤겔이 주장 바와 같이 두 가지 명제 사이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명제 이전에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셸링의 변증법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헤겔의 그것과는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립과 갈등은 명제와 반대 명제에 의해서 부딪치는 게 아니라, 일탈되어 나오려는 주체의 노력 자체에서 명료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명이 불필요한) 단순한 사실”은 셸링에 의하면 비단 (발설된 무엇의 필연성과는 다른) 어떤 우연적인 무엇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체가 객체로 변화하려는 지속적인 사실은 (질적으로 다른 약화된 의미에서) 처음부터 어떤 우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우연, 혹은 근원적인 우연은 “외연성Daßheit”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연성”은 셸링이 존재의 개념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한 전문용어입니다. 존재란 존재의 그릇과 존재의 내용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외연성이란 이 가운데 존재의 그릇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독일어로 “Daßheit”이며, 라틴어로는 “Quodditas”라고 명명되며, 그리스어로는 “ότι”라고 명명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존재의 내용물에 해당하는 용어는 “내포성”으로서 독일어로는 “Washeit”이며, 라틴어로서는 “Quiddditas”, 그리스어로는 “διότι”라고 명명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한 곳에 정착시키기 위한 강한 에너지입니다. 뒤이어 나타나는 우연은 주체 존재의 어떤 아직 충분하게 객체로 변하지 못한 외연성입니다. 이에 관해서 셸링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체 자체가 이러한 존재를 어떤 끌여 당겨진, 우연한 무엇으로 느끼고 있다.” 셸링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이러한 과정에 관해서 세밀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넘어서서 물질에 관해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셸링은 육체적인 물질과 관련하여 처음에는 완전히 천국으로부터의 나락이라는 신화학에 의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육체적인 물질은 셸링에 의하면 모든 사물의 가장 어두운 부분으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단순한 우상”이며 스스로 낙락한 잔여물에 불과합니다. 영혼의 우상으로서의 물질은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오로지 거울을 통해서 인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적 물질이란 “지하 명부 하데스에 있는 그림자의 상”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현실의 순수한 이상으로서 개벽될 수 있는 명백성 (!)을 부정하는 한, 육체적 물질은 전적으로 무의 본질에 속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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