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비행하는 이카로스 (1)

필자 (匹子) 2022. 8. 29. 11:46

서문: 비행하는 이카로스

 

- 인생은 한마디로 말해 비행하는 일과 같다. 비행(飛行)하고 비행(非行)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희망을 품은 채 버티는 행위, 바로 꿈과 저항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필자 匹子) -

 

- 한 인간의 가치 있고 올바른 삶은 단순히 성공 여부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생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올바르게 선택했는가? 하는 물음에 의존하는지 모른다. 결정하고 선택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어렵다. 무언가를 올바르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필요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문제 해결 능력 뿐 아니라, 미래를 투시하게 하는 창의력 그리고 지금 여기의 난제를 꿰뚫을 수 있는 비판력일 것이다. 이를 고려할 때 이른바 삼포 세대에 속한다고 하는 남한의 대학생들이 비록 힘들겠지만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장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 가시적인 기술이 아니라,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세, 다시 말해서 창의력, 비판력 그리고 문제 해결의 능력이라고 판단된다. (필자 匹子) -

 

친애하는 J, 당신을 위해 다시 아들을 출산합니다. 아들의 이름을 『비행하는 이카로스』로 지어보았습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망각의 시대에 책 한 권 출판한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학문적) 삶의 고해성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출간 행위는 어쩌면 낯선 고해소에 들어가는 내 영혼의 무거운 발걸음 같이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필자는 서문에서 거추장스러운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책의 내용만을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써 서문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비행하는 이카로스. 20세기 서양문학과 문화』에 소개되는 글들은 거시적으로 고찰할 때 문화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어쩌면 독어독문학, 다시 말해 독일어와 독일 문학이라는 협의적인 개념을 벗어나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책에 거론되는 대부분의 사항은 폐쇄적 학문 영역으로서의 독어독문학이 아니라, 보다 광의적이고 열린 개념인 “독일 문헌학 deutsche Philologie”에서 논의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학문의 체계는 여전히 식민주의 사관에 바탕을 둔 학문적 폐쇄주의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나는 1980년대에 뮌헨과 빌레펠트에서 문학, 철학, 심리학을 힘들게 공부했지만, 귀국 후에 나에게는 “독일 소설 전공자”라는 낙인 (?)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전공을 깊이 천착하려면 인접 학문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사람들은 마치 나의 발목에 “독일 소설 전공자”라는 보이지 않은 족쇄를 채운 것 같았습니다. 인접 학문을 연구하는 다른 학회에 참석하면, 사람들은 마치 이방인이 찾아온 것처럼 멀거니 쳐다보곤 하였습니다. 아마도 한국의 많은 학자들도 이러한 병폐를 체험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일제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한 학문적 폐쇄주의의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문헌학”이라는 보다 광의적인 카테고리를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문 계열의 학문적 공감대는 확장될 것이고, 학제적 연구를 통해서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상호 관련성은 더욱 배가된 결과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만약 문헌학이 어문학 분야와 인문학 분야에서 통합될 수 있다면, 인문과학의 연구는 사회과학의 연구와 학제적 차원에서의 놀라운 학문적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설픈 학문적 통섭을 경계해야 하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문의 영역을 폐쇄적으로 구분하고 분할하는 행위가 아니라, 학문적 소재 내지는 연구 대상 중심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적이고 상호 관련적인 학제적인 테마를 중심으로 논의를 개진하는 일일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문학, 역사 그리고 철학 가운데 문학의 영역을 현실적 제반 조건과 가장 동떨어진 신빙성이 결여된 학문 분야라고 속단하곤 합니다. 마치 “문학 文学”이 “학문 学文”을 뒤바꾸어 기술된 표현이듯이, 문학이 인문과학의 영역 가운데 가장 경박하고 현실성이 결여된 학문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능적 측면이 아니라, 진리 추구의 본질적 면을 고려할 때 문학이야말로 역사와 철학이라는 두 개의 바퀴 달린 인문학의 수레를 끄는 학문적 영역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헌)학은 “지금 그리고 여기”의 현실의 제반 사항들을 다룬 문헌을 연구할 뿐 아니라, 미래의 어떤 가능성을 도출해내는 연구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실제 현실에 존재할 수도 있는 가상적 현실 내지는 차제에 출현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이 문헌학적 연구 대상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다른 차원에서 고찰한다면 철학이라는 연구 분야가 문학 (미래)과 역사 (과거)를 이끄는 학문으로 설정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미래의 어떤 가능성을 추적하고 이에 관해서 학문적 진리를 밝혀나가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더 나은 미래 역시 우리에게 보장되지 않습니다. 물론 곰곰이 따져보면 가능성의 개념이 일상의 삶에서 수없이 차단되고 파기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가능성은 오로지 가능하다는 특징만으로 비난당하기 일쑤라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대하고 갈구하는 생명체이며, 문학은 인간의 어떤 가능성, 갈망 그리고 계획의 심리적 욕구를 부분적으로 충족시켜주는 매개체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학문 행위는 언제나 과거 그리고 현재만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고려할 때 문학의 어떤 새로운 기능은 최소한 용인되고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