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서로박: 노동자의 자유시간 그리고 스포츠

필자 (匹子) 2022. 7. 22. 11:45

1. 자유시간은 정말 자유로운 시간인가?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한낱 객체에 불과합니다. 저녁의 자유시간은 적어도 노동자에게는 아직 자유로운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게 사적이든 아니면 오래된 관습에 의한 것이든 간에- 노동력의 재생산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친구들과 만나 환담을 나눕니다. 혹자는 저녁에 술을 마심으로써 목의 먼지를 씻어 내립니다. 혹자는 집에서 다리 뻗고 TV를 시청합니다. 그게 바로 자유시간의 일감이라고 합니다.

 

노동자들이 맑은 공기를 마시러 저녁에 산책 나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심신이 지쳐 있기 때문에 걷는 것조차 싫습니다. 게다가 수도권에는 산책할만한 좋은 공간도 따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평지를 녹지 공원으로 조성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아파트 짓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노동자는 우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게임, 화투 놀이 등이 극성을 부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가끔 다른 사람에게서 돈을 따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생업의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와 수월하게 일하고 싶은 욕구가 동시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교나 오락을 통해서 기쁨을 느끼는 자는 자본주의 삶의 투쟁 속에서 직접 이룩하지 못한 것에 대해 대리 만족을 느낍니다.

 

2. 여가와 스포츠

이는 스포츠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유롭게 나타난 경쟁이 다른 게임으로 대치된 열성이 바로 스포츠로 이어집니다. 경제의 영역에서 성공을 거두는 게 불가능하면 그럴수록, 스포츠에서의 경쟁 싸움은 더욱더 치열하고, 더욱더 구경하는 사람들을 유혹하지요. 휴일이 되면 수천 명 수만 명의 관람객이 하나의 그룹을 이루어 프로 게임을 즐깁니다.

 

물론 중세 레슬링 경기의 경우에는 이와는 달랐습니다. 시합이 개최되었을 때, 선수들은 서로 경쟁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무조건 일등을 목표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레슬링 시합은 어떤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경기의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고결한 인간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결승 경기에 패배한 선수들 역시 이등 수상자로 명예로움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증권 시장에서 비참하게 당했을 때 파산을 선고하는 그러한 경쟁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스포츠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또한 개개인의 건강을 도모하게 해줍니다. 스포츠는 비단 육체적 건강을 향상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 건강에도 많은 이 점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운동이지요. 운동선수들 가운데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니까 스포츠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스포츠가 자본주의의 논리와 결합한다는 점입니다.

 

3. 직장인과 스포츠

직장인들 역시 스포츠를 즐깁니다. 이는 프로 경기 속에 담긴 경쟁적인 모든 모습을 필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 자체 하나의 상징입니다. 즉 자유 경쟁은 이제 중앙 집권적인 경제 구도로 인하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자유 경쟁은 개인 대 개인의 경쟁이라면, 오늘날 집단과 집단의 구도로 인하여 오늘날 좀처럼 발견되기 힘듭니다. 스포츠는 이러한 자유 경쟁을 그대로 보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즐기고 대리 만족하게 만듭니다.

 

자본은 그게 자유 경쟁의 상과 함께 작동하는 한, 스포츠 게임을 촉진시킵니다. 노동자들은 자유시간에 선수들이 자유로이 경쟁하는 모습을 생생히 바라봅니다. 마치 인간의 육체가 최소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는 것 같아 보입니다. 또한 이른바 올림픽 시합의 경우 마치 그리스의 일부가 오늘날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아 보이지요. 즉 어느 남자가 승리를 구가하며,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의 축제에 참석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자본가는 “자유 경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더 이상 거짓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스포츠는 유용하게 활용됩니다. 심지어 재화 및 직원들의 노동력을 새로이 예속시키는 그러한 노골적인 상태에서 스포츠는 자본가 혹은 국가에게 도움을 줍니다. 이 경우 자본가 혹은 국가는 개개인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들은 회사에 그리고 국가 자본주의 내지는 독점 자본주의에 공동적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파시즘과 체조

특히 체조는 파시즘의 시기에 이른바 “자유시간을 위한 일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대기업들은 직원들로 하여금 스포츠를 즐기게 하였습니다. 이는 스포츠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충직한 “복종심”이 형성되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입니다. 가령 휴일에 기업들은 직원 체육대회를 개최합니다. 단결과 복종심은 바로 자본주의의 사업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특정한 회사의 깃발을 승리로 인도하기 위한 모티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 구도의 변화 없이는 스포츠의 의미 역시 결코 변모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파시즘 국가였던 독일은 40년에 이른바 “밖에서 돌아다니지 말라.”는 슬로건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방 체육 훈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건전한 스포츠 정신의 종말을 의미했지요. 그러니까 저녁 시간의 산책은 맑은 공기를 마시는 일 그리고 마비된 사지에 자극을 주기 위한 기술 등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J, 저녁의 자유로운 산책을 금지시키려고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았습니다. 즉 부르주아들은 일반 사람들의 자유시간을 앗아감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회사에 봉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했던 것입니다.

 

즐거움을 통한 에너지 충전 - 이는 궁극적으로 다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시간에 행하는 스포츠는 노동 이후의 시간에 이미 활용된 상품인 노동력이 제대로 수선되는 그러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자유시간에는 온갖 잡다한 일이 발생해야 합니다. 너무나 재미있는 일에 넋을 잃어야 노동자의 머리에는 다른 해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직원들은 여러 가지 다른 가능성에 대해 참담하게 숙고하지 않으며, 마치 그가 다루는 짐짝 하나처럼 거대한 단체에 계속 비굴하게 종속될 수 있다고 합니다.

 

5. 진정한 자유시간은 언제인가?

분명히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자유시간에 행할 수 있는 일감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안타깝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자유시간이 만인의 적에 의해서 조종되고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요일에 자연과 접촉하며 휴식을 취하는 것 - 이것처럼 노동자의 노동에 관심을 지니고 있는 자들의 의도와 그렇게 밀접하게 결부된 것은 없었습니다. 노동력으로서의 상품 그리고 휴식 시간에 이룩하는 상품 가치의 향상 등을 생각해 보세요. 노동자는 휴식을 취하면서도 결코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팔은 일터의 기계 앞에 그리고 저녁 식탁에 앉아 있는 남자를 조종합니다. 스포츠 센터에서 땀 흘리고 있을 때, 혹은 자연을 벗 삼아 휴일 병원에서 누워 있을 때도 노동자의 몸은 자본주의의 팔에 휘감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망하는 것, 우리의 또 다른 욕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절대로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태만이라고 해서 천국으로부터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편린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열정은 스스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일 뿐 아니라, 예외 없이 어떤 의무와 강제를 벗어난 삶의 상태를 추구합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멋지게 살다 죽는 그러한 찬란한 상태 말입니다.

 

'2 나의 잡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행하는 이카로스 (2)  (0) 2022.08.29
비행하는 이카로스 (1)  (0) 2022.08.29
서로박: 혐오에서 연민으로  (0) 2022.07.05
박설호: 견유 문학론 (3)  (0) 2022.06.26
박설호: 견유 문학론 (2)  (0) 2022.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