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서로박: 혐오에서 연민으로

필자 (匹子) 2022. 7. 5. 11:53

우리는 현재 분노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은 박한 월급에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한다고 분노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빈부차이로 인한 경제적 박탈감으로 분노하며, 중산층 사람들은 자식 교육을 생각하면서 SKY를 우선시하는 학벌 중심주의에 분노하고,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서 차별당하며 살아야 하는 극한적 현실에 분노하며, 농민들은 더 이상 수입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국가의 세계화 정책이 분노하고, 학생들은 불투명한 미래와 수수방관하는 사회에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분노가 계기가 되어 결국 마음속에는 점점 혐오가 쌓여갑니다.

 

내면에서 분노가 축적되면, 자신과 다른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혐오하는 감정만 남게 됩니다. 그저 상대방을 무시하고 외면할 뿐이지요. 무시와 혐오의 감정 속에는 어떤 그럴듯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김종갑 교수는 증오와 혐오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증오와 혐오는 어떤 사물 내지 사람에게 대한 싫어하는 감정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증오 속에는 증오하게 된 구체적 이유가 있지만, 혐오 속에는 싫어하게 된 이유나 감정이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 혹은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은 뚜렷한 이유없이 그 대상이 싫을 뿐이라고 합니다. 혐오의 감정은 그냥 싫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혐오는 “본능의 비명”이며, 가래침을 뱉는 소리“라고 합니다. (김종갑: 혐오, 감정의 정치학, 은행나무, 2017, 194쪽).

 

사실 누구에게나 싫음과 좋음의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해당하는 사항이지, 머리에 해당하는 사항이 아닙니다. 좋고 싫은 감정은 인간이 후천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좋고 싫은 감정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능과 같습니다. 나아가 누구에게 좋은 것은 누구에게 싫은 것일 수 있습니다. 혹자는 커피를 싫어하고, 녹차를 좋아합니다. 혹자는 녹차를 싫어하고 커피를 좋아합니다. 이는 취향일 뿐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취향에 관해서 사고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것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싫어함의 정도가 너무 과도할 때, 혐오의 감정이 솟아오르고, 이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를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그 하나는 본능적 거부감이고, 다른 하나는 투사적 혐오감입니다. 첫째, 본능적 거부감: 어떤 사람은 특정 음식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 음식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난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썩어가는 똥냄새를 맡으면서도, 이것이 나중에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자양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혐오감을 삭힌다고 합니다. 

 

사실 오늘날 끔찍할 정도로 혐오스러운 것은 썩지 않는 플라스틱이지, 똥은 아닙니다. 플라스틱 때문에 물고기와 고래가 목숨을 잃곤 합니다. 그밖에 세상에는 별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쓰레기를 매우 더럽게 여기고, 쓰레기더미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내면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서 항상 청결을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어쩌면 후각인지 모릅니다. 후각이야 말로 가장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라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독일의 광고들 가운데에는 이를테면 "여성들을 자극하는 향기 Der Duft, der Frauen provoziert."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향수는 -파트릭 쥐스킨트도 암시한 바 있지만- 인간의 애호감을 자극하는 가상적 달콤함의 마약인지도 모릅니다.

 

둘째, 투사적 혐오감: 사회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혐오감은 이에 해당합니다. 1. 남성 혐오: 혹자는 남성들이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을 비하함으로써 자신의 열등의식을 감추는, 왜소음경을 지닌 한남충 (韓男虫))이라고 비난합니다, 2. 여성 혐오: 혹자는 여성들이 성노리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비난합니다. 3. 동성애자 혐오: 혹자는 동성애자들이 여성을 사랑하기는커녕 불륜을 저질러서 결혼의 가능성을 앗아가는 에이즈 보균자라고 비난합니다, 4. 외국인 노동자 혐오: 혹자는 외국인 노동자가 머나먼 타국까지 까지 와서 우리의 취업의 기회를 박탈시키는 철새들이라고 비난합니다, 5. 레즈비언 혐오: 혹자는 레즈비언들이 남성 전체를 경멸하고, 딜도 Dildo만 사용하는 무한한 음탕함의 욕망을 즐기는 암컷들이라고 비난합니다,

 

6. 장애인 혐오: 혹자는 장애인들이 자신의 신체적 심리적 결핍을 최대한 부각시켜서 국가의 세금만 축내는 버러지들이라고 비난합니다, 7. 노동자 빈곤층 혐오: 혹자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머리에는 똥만 가득 찬 채, 흙속에 수저만 비집어대는 개돼지들이라고 비난합니다, 8. 유색인종 혐오: 혹자는 흑인들이 검은 탈을 쓴 채 인간 행세를 하는 더러운 욕정의 동물들이라고 비난합니다, 9. 난민 혐오: 혹자는 난민들이 나의 거처와 일자리를 탐하며, 국제적으로 동냥하는 거지들이라고 비난합니다. 10. 노인 혐오: 혹자는 노인들을 더 이상 쓸모없는, 꼴 보기 싫은 쭈그렁이라고 비난합니다.

 

상기한 혐오 증세는 (1) 과장된 감정이거나, (2) 거짓말을 참으로 믿는 데에서 비롯한 증상이거나, (3) 자신의 내면의 하자를 밖으로 전가시키는 데에서 비롯한 반발 심리에 해당합니다. 특히 옛것을 좋아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이러한 반발심리가 유독 강하게 출현합니다. 체제 안주주의, 정치적 보수주의, 국수주의의 근본에는 낯선 무엇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의 신드롬이 마치 밝혀지지 않은 바이러스처럼 득세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난민을 돕자는 배우 정우성의 발언이 SNS 상에서 엄청난 부정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 경우 소시민들은 난민 문제를 따지는 게 아니라, 난민 문제를 언급하는 개인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난의 배후에는 자신의 열등한 처지에 대한 불만 그리고 남의 행복보다 나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다는 이기주의의 심보가 은밀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적 말썽을 일으킬 정도의 혐오감을 표출하는 인간들은 지극히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소시민적 보수성을 드러냅니다. 소시민들의 정서적 혐오의 증세를 철저히 이용하는 자가 바로 히틀러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종이라고 공언하는 순간 증오와 혐오는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한 경멸과 탄압의 욕구로 돌변하게 됩니다.

 

차라리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혐오를 혐오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사회적 혐오의 여러 증상을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쩌면 관용에 근거하는 방관의 자세를 습득해야 할지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관이란 타인의 고충을 그냥 무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자 내지는 타자의 다른 삶의 방식을 용인하자는 말입니다.

 

가령 "침"을 생각해 보세요. 입속에 고여 있는 침은 나의 소화 기능을 돕는, 꼭 필요한 액체입니다. 그런데 나의 침이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순간 침은 타자에게는 더러운 무엇으로 인지됩니다. 나의 침은 입에 고여 있을 때 깨끗하지만, 밖으로 튀길 때 불쾌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렇듯 혐오의 배후에는 자아의 깨끗함, 순수함, 청결함, 결벽증세 등에 대한 반대급부의 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은 지극히 깨끗하지만, 남들은 나만큼 깨끗하지 않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혐오를 떨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혐오를 혐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그것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혐오하는 자를 포용하고 끌어안는 데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설령 타자가 "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거나 비난하더라도, "나"는 그를 이해하며 그와 함께 애도하고 슬픔과 한을 달래려고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연민 내지 동정심이란 독일어에 의하면 "함께 괴로워하는 행위 Mit- Leid"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를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자를 용서하고 달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행위입니다. 다른 한편 분노하는 자가 자신의 혐오감을 떨치려면 혐오의 대상을 자신에게 옮겨놓는 연습을 행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의 노여움이 오로지 "나"의 자아에서 비롯한 것이며, "나"의 전체적 존재는 이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함께 괴로워하고, 타인의 비극을 나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현인 나탄은 자신의 처자를 살해한 기독교도의 딸을 양녀로 받아들여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내와 자식들을 살해한 원수를 찾아 복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탄은 원수의 자식을 자신의 딸로 자라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삭히고 타인의 증오와 비극을 끌어안는 일 -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냥 단순히 고찰해 봅시다. 너무 과도하게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극도로 싫어하거나 미워하면, 장수 (長寿)에 지장이 있습니다.

 

자고로 낙천적인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고 오래 삽니다. 증오심 때문에 우리는 밤에 깊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괴로움이 많으면, 입맛이 사라져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기분 나쁠 경우 폭식하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혐오를 연민으로 변화시키는 과업입니다, 그러면 내면에 따뜻한 인간애 내지는 평온한 사랑의 욕구가 어쩌면 내면의 심연에서 부글부글 발효할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혐오를 떨치고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는 사람을 위해서 필자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놀라운 말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en,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n.

 

그러니 괴물과 정면으로 싸우지 마십시오. 싸우는 동안 당신 또한 괴물이 됩니다. 그렇디고 괴물을 용서하자는 뜻으로 곡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괴물을 용서하지는 말고 그의 잘못을 기억하되, 괴물을 불쌍하고 측은한 피조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괴물에 대한 측은지심 - 이러한 태도는 밖으로는 괴물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변모시킬 수 있고, 안으로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나 자신을 가다듬게 작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