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하인리히 하이네

필자 (匹子) 2022. 7. 11. 11:41

수많은 암벽들

힘든 다리 (足)

전망은 없고

하인리히 하이네

 

Viele Steine,
müde Beine,
Aussicht keine,
Heinrich Heine.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가 1827년 어느 안개 자욱한 어느 날 산에 올라서 암벽에 새긴 글입니다. 그만큼 그의 행적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인리히 하이네 (1797 - 1856)는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주자이며, 낭만적 정신을 극복한 작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아름다운 연애시를 남겼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사회비판의 글과 문학작품을 남겼습니다. 특히 그는 많은 4행시를 썼는데, 시의 대중화에 기여하였습니다. 당시까지 시인들은 주로 찬가, 비가 등의 정형시를 많이 썼는데, 하이네는 이를 극복하고 사행시 등 보다 쉬운 문학의 형태를 채택하였습니다. 게다가 에세이, 풍자의 글 등과 같은 산문을 통해서 낙후한 독일 전 지역을 계몽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1811년 나폴레옹이 독일의 뒤셀도르프를 장악하는 모습입니다. 하인리히 하이네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학자들은 뒤셀도르프를 하이네의 고향으로 간주합니다. 그에게는 여동생 한 명과 남동생 두 명이 있었습니다. 부유한 유대인 집에서 태어난 하이네는 아버지가 죽자, 삼촌인 살로몬 하이네로부터 풍부한 학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그는 유년 시절을 혼란한 독일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사진은 아말리 하이네의 초상화를 찍은 것입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사촌 여동생을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미는 시인의 뮤즈로 작용하였습니다. 1815년부터 하이네는 상인 수업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신분이었으므로, 사회 진출하는 데 여러 가지 악재와 직면했습니다. 1816년 하이네는 삼촌의 충고로 함부르크에 있는 상인 학교에 다닙니다. 삼촌은 사업에 성공하여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삼촌은 1844년 사망할 때까지 조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습니다. 1819년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1819년 하이네는 괴팅겐과 본을 오가면서 공부하며, 본 대학에서 슐레겔의 강의를 듣기도 했습니다. 

 

 

 

 

 

 

 

괴팅겐 대학의 어느 학생이 하이네를 유대인이라고 비난했을 때 하이네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하였습니다. 결투는 남자들의 자존심을 지키거나 여자를 차지할 때 흔히 사용되는 끔찍한 장난이었습니다. 혹자는 얼굴에 칼의 상처를 얻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Doktorschmiss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하이네는 학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이네는 학교를 옮겨 이번에는 베를린 대학교에 다녔습니다.

 

 

 

 

 

 

 

1822년 드디어 하이네의 시들이 베를린에서 발표되기 시작합니다. 사진은 그의 시집 "노래의 책 Buch der Lieder"의 원본입니다. 1827년 이 시집이 간행되었는데,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음악가 슈만은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여서 작곡하였습니다.

 

 

 

 

 

 

 

1829년에 하이네는 신진 작가로 두각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하이네와 아우구스트 폰 프라텐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1829년 하이네는 "낭만적 외디푸스"라는 희극을 발표했는데, 아우구스트 폰 플라텐은 이 작품을 "죽어가는 저열한 인종의 끔찍한 극"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두 사람의 논쟁은 결국 유대인 탄압의 발언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이네 역시 플라텐의 시작품 속에 동성애의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고 역공을 폈습니다. 플라텐 역시 끔찍한 상처를 입고 이탈리아로 망명하였습니다.

 

 

 

 

 

 

 

 

 

하이네는 시인으로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항상 자신의 주위에 맴도는 반유대주의라는 편견에 시달렸습니다. 1827년에서 1829년에 영국과 아탈리아 등지로 여행을 떠나, 세계시민으로서의 넓은 시각을 견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하이네는 시작품 뿐 아니라, 평론 그리고 칼럼 등을 많이 썼습니다. 이때 독일의 제후들은 그에게 출판 금지 그리고 검열의 칼날을 드러내곤 하였습니다. 1830년에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하이네는 더 이상 독일 땅에 미련을 두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게 됩니다.

 

 

 

 

 

 

 

 

 

하이네는 죽을 때까지 약 25년간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신문의 해외 기자로 일하며 글을 발표합니다. 이로써 그는 프랑스와 독일의 문화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프랑스에서 하이네는 글을 마음대로 쓰면서, 자신의 자유로운 정신을 드러내게 됩니다. 1833년에 하이네의 모든 글들은 프로이센에서 간행 금지처분을  받습니다. 1833년에서 1835년 사이의 모든 젊은 독일 작가들이 청년독일파라는 이름 하에 공개됩니다. 그는 파리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서 사귑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베를리오즈, 뵈르네, 조르즈 상드, 쇼팽, 뒤마 등의 유명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생시몽 그리고 앵팡틴과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이네는 뵈르네와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하이네는 어떤 경우에도 집단에 가담하지 않고 자유로운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뵈르네는 급진적 공화주의를 추구하였습니다. 그의 눈에 하이네는 아무런 소속감이 없는 자유로운 기회주의 지식인으로 비쳤습니다.

 

 

 

 

 

 

 

이네는 사생활에 있어서도 너무나 자유분방하였습니다. 1840년 유부녀와의 염문으로 인하여 슈트라우스와 결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1841년 그는 마틸데라는 여성과 결혼합니다. 그미의 외모는 아름다운 편이었지만, 씀씀이가 무척 헤퍼서 마르크스 등과 같은 친구들은 결혼하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이네는  삼촌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게 되어 수년 동안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게다가 하이네는 글을 써서 많은 원고료를 수령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틸데는 돈을 탕진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위의 사진은 라인강변에 있는 로렐라이 언덕입니다. 다음을 클릭하면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로렐라이

 

https://www.youtube.com/watch?v=_c7ji5nHt6c

 

 

 

 

 

 

 

 

 

1902년에 에드문트 브뤼닝이 제작한 로렐라이 동상입니다. 하이네는 동화적인 것과 신화적인 것을 결합시켜서 낭만주의 문학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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