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괴테와 여성 그리고 문학

필자 (匹子) 2022. 5. 24. 10:59

주관적 판단이지만 나는 괴테 그리고 그의 문학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너무 귀족적이고, 시민주의적이며, 사치스럽기 때문입니다. 괴테의 문학은 민초 출신인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다고 오랫동안 여겨 왔습니다. 흙수저였던 나는 내심 마음속으로 괴테를 질투하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ㅋㅋㅋ 그래도 당신은 괴테에 관해서 알고싶어 합니다. 그래서 괴테를 다루려고 합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마 그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라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작가도 없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박사학위를 받은 법률가였으나. 직접 법관으로 일하지 않고, 유산으로 받은 돈을 증식시키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이로써 아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괴테의 아버지는 영리하고 여러 방면에 관심이 많았으나, 엄격하고 완강한 인간이라서, 가족들과 여러 번 다투었습니다. 괴테의 어머니는 밝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녔는데, 괴테 다음으로 자식을 많이 낳았습니다만, 오로지 코르넬리아만 살아남았습니다. 괴테는 여동생 코르넬리아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몇몇 전기 작가들은 괴테가 여동생과 깊은 근친상간의 관계에 빠진 적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사실로 증명된 바 없습니다.

 

 

 

 

괴테는 여동생과 함께 공부하는 데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리했으며, 여러 가지 공부 외에도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히브리어, 유대 독일어 등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인문 과학의 제반 공부 외에도 자연과학, 종교, 그림그리기, 승마, 피아노와 첼로의 연주, 춤 그리고 펜싱 등을 배웠다고 합니다. 괴테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작품을 읽었습니다. 다정다감한 어머니는 그를 위해서 인형극 이야기, 프로테스탄트의 성서에 관한 책 등을 읽어주곤 하였습니다. 이는 괴테로 하여금 천재 작가로 발돋움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한 고트리프 피히테 (1762 - 1814)

 

자고로 돈이 있어야 잘 먹고 잘 자며, 편안히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당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괴테에 비하면 피히테는 말을 돌보는 천한 출신의 아이였습니다. 마굿간에서 말을 돌보아야 했지요. 농장 주인이 몸이 아파, 성당에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어린 피히테를 대신 보냈습니다. 가서 신부님의 설교를 듣고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피히테는 한 줄도 빠짐없이 신부의 말씀을 외워서 전달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농장 주인은 영리한 소년의 재능에 탄복하여, 가난한 피히테가 공부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피히테는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진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기숙사의 전경입니다. 1765년 가을에 괴테는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 라이프치히는 작은 프랑크푸르트보다도 더 개방적인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작은 파리"라고 명명하곤 했습니다. 괴테는 부모의 집을 떠나 자유를 누렸습니다. 극장에 다니고 근처로 여행을 가는가 하면, 처음으로 어느 처녀와 연애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괴테는 병에 걸려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폐결핵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때 부모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1770년 4월에 괴테는 슈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다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슈트라스부르는 당시에 4만 3000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슈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곳에서 헤르더를 알게 된 것은 그에게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목사인 브리온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프리드리케 브리온이라는 처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미로 인하여 아름다운 연애시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1771년에 괴테는 법학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합니다. 그것은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학위를 마친 다음에 괴테는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라는 국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때는 1773년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그는 질풍과 노도라는 문학 사조의 기수로 등극합니다.

 

 

다음을 클릭하면 표가 나오는데, 이것은 괴테가 사랑한 여인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연도 이름 연보 내용 만남의 장소 나이
1766 Anna K. Schönkopf 1746 818105 포도주상인의 딸. 레싱의 연극 공연으로 만남. 2년의 사랑. 합의로 이별 Laune des Verliebten 라이프치히 16
1768 Susanna K. Klettenberg 172312 177412 사원의 수녀. 괴테의 어머니와의 절친. 여성 작가. 괴테가 아팠을 때 극진히 간호해줌. 1774년 괴테는 그미를 방문, 플라토닉 러브. Wilhelm Meisters Lehrjahre 프랑크푸르트 19
1770
-71
Friedrike Brion 1752418134 요한 야콥 브리온 목사의 딸. 1770년 가을에 만남. 피 끓는 청춘의 뜨거운 사랑. 1799년 재회, 야콥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Sesenheimer Lieder 스트라스부르 21
1772 Charlotte Buff 1758118281월 사망 1772년 베츨라의 가장무도회에서 만남. 케스트너라는 남자의 약혼녀. 이룰 수 없는 사랑.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베츨라 24
1775 Anna E. Schönemann 1758618175월 사망 은행가의 딸. 1775년 초에 만남. 1775년 부활절에 몰래 두 사람은 약혼식을 올림. 격정적인 살 섞기. 즉시 파혼함. Lili-Lieder 프랑크푸르트 26
1775- 1789 (1801년부터) Charlotte von Stein 17421218271월 사망 지적 수준을 갖춘 자유 부인. 괴테의 친구이자 연인. 괴테보다 7세 연상. 정신적 연인 관계. 문학적 교감을 주고받음. 괴테의 편지를 많이 받음. 괴테가 1789년 크리스티안네와 깊은 애정에 빠지자, 절교를 선언함. 1801년 다시 교우함. Iphigenie auf Tauris」 「Torquato Tasso 바이마르 26-40
1784. Karoline Schelling 1763 - 1809 클라우스탈에 거주하는 유부녀 카롤리네와 만남, 격렬한 정사 끝에 임신함. 아우구스테는 나중에 괴테의 딸로 밝혀진다. 카롤리네는 나중에 철학자 셸링과 결혼함. 클라우스탈 35
1788 Christiane Vulpius 1765618166월 사망 괴테보다 16세 어린 처녀. 평민 출신의 평범한 여인. 이탈리아 여행 후에 사랑에 빠짐. 괴테의 난잡한 사생활에 고통을 느꼈으나, 내조함. 주위 귀족들의 반대. 나폴레옹 군대의 위험 속에서 괴테를 구함. 고마음으로 그미와 결혼. Römischen Elegien」 「Venetianischen Epigramme 바이마르 39
1807 Wilhelmine Herzlieb 1789518657월 사망 괴테보다 40세 어림. 180758세의 나이에 예나를 방문했을 때 사랑의 감정을 느낌. W1826년 에나의 법률교수와 결혼함. 한 번의 살 섞기와 늦사랑.Wahlverwandtschaften에 등장하는 오틸리에. 예나 58
1814 Marianne Willemer 178411186012월 사망 여가수. 시인.1814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남. 깊은 사랑을 느낌. 성관계? 1815년 어느 은행가와 결혼함.West-östlichen Divan』「Rhein und Main 하이델베르크 65
1823 Ulrike von Levetzow 18042189911 74세의 괴테가 사랑한 처녀. 칙칙하다 여기면, 저열하고 칙칙하며, 아름답다 생각하면 무조건 아름다운 게 성 Sex이고 사랑입니다. Marienbader Elegie 마리엔바트 74

 

 

 

 

괴테의 생애를 살펴보면, 우리는 "부럽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사랑 이후에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괴테는 천재 작가였습니다. 과연 무엇이 누군가를 사랑한 다음에 펜을 거머쥐는 작가로하여금 불멸의 작품을 쓰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의 창조성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요? 1774년 괴테는 베츨라에서 아름다운 샤를로테 부프라는 여성을 만납니다. 그미와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괴테는 4주에 걸쳐서 밤낮으로 심혈을 기울여 소설 한 권을 완성합니다. 그것은 바로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였습니다.

 

 

괴테의 문학을 낳게 한 것은 불가능한 무엇을 끝까지 열정적으로 추구하려는 의지였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부자유의 질곡에 빠져서 자유를 구가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물음은 청년 괴테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괴테는 법학 박사를 취득한 다음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1776년 6월 11일 그는 당시 어느 공국으로부터 추밀원 회원으로 임명되어 연봉 1200 탈러를 받게 됩니다. 그것도 1815년까지 매달 받게 되었으니, 작가라면 누구나 과히 그를 부러워할만 합니다. 33세의 나이에 그는 경력의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행한 여인은 샤를로테 폰 슈타인이라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미는 괴테보다 일곱살이 많았으며, 이미 여섯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괴테의 편지에 의하면 처음에 슈타인 부인은 그와의 동침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괴테는 자신을 거부하는 여성에게 더욱더 열정적으로 다가가려고 했습니다. 샤를로테는 지적이고 영리한 여성이었습니다. 괴테는 자신을 멀리하는 슈타인 부인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미가 없었더라면 이피게니에, 타소와 같은 극작품은 탄생하지 못했으리라고 합니다. 정신분석학자 쿠르트 바일러의 주장에 의하면 괴테는 37세때 로마에서 처음으로 여성과 육체 관계를 맺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캄파냐에서의 괴테". 화가 빌헬름 티쉬바인은 이 그림을 1786년에 완성하였다.

 

1787년 괴테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납니다. 마차를 타고 갔는데, 가는 곳마다 통행세를 받아서, 괴테는 독일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본토를 방문하는 데 거의 일주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지난 10년 동안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 냅니다. 머리를 식할 겸, 집필한 작품에 대해 여러 가지 확인할 겸 해서 남부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어느 출판업자는 전집 간행을 제안했는데, 이때 괴테는 몹시 당황했다고 합니다. 여러 작품을 집필하기는 했으나,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슈타인 부인과의 관계가 마음을 어지럽히게 만들었습니다. 괴테는 평범한 시민 출신의 여성, 크리스티안네 불피우스와 깊은 관계에 빠졌을 때, 슈타인 부인은 이에 대해 몹시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사실 크리스티안네는 귀족도 아니고, 영특하지도 않은, 마치 하녀처럼 허드렛일에 몰두하는 여성이었습니다.

 

 

 

사진은 괴테가 스케치한 이탈리아의 풍경입니다. 솔파타라 폰 푸추올리라는 지역. 아니나 다를까, 괴테는 미술에도 재능을 드러내었습니다. 그의 작품 색채론은 오늘날 시각에서 고찰할 때 과히 놀랄만한 내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괴테는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유아독존적인 기질을 지녔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괴테는 어떠한 젊은 작가를 도와준 적도 없고, 후배 시인을 발굴한 적도 없었습니다. 19세기 초에 어느 대학생이 파우스트 제 2부를 써서 그에게 보여주었더니, 매우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파우스트 제 1부를 집필하였으니, 제 2부 역시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파우스트의 소재로 작품을 집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밖에 괴테는 빌헬름 텔의 전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할 계획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를 소재로 작품을 완성한 사람은 실러였습니다.

 

 

 

 

사진은 크리스티안네 불피우스를 가리킵니다. 그미는 평민 출신의 여성이었습니다. 1788년 그미는 청소하는 하녀로 일하고 있다가, 괴테를 찾아와서 자신의 남동생이 법학을 공부한 뒤에 직장을 못 구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이때 괴테는 그미를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괴테는 처음부터 그미를 마치 하녀 대하듯이 했습니다. 낮에는 몸종처럼 부리고, 밤에는 그미와 동침하였습니다. 크리스티안네는 괴테가 여러 명의 여성들을 사랑하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질투심을 억누르며 살아갑니다. 어느 날 나폴레옹 군대가 침입하여 괴테가 목숨을 잃을 뻔 했을 때 크리스티안네는 기지를 발휘하여 그를 구출해 줍니다. 괴테는 그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크리스티안네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실러의 사진. 괴테는 실러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바이마르로 초청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789년에서 1804년까지 이어집니다. 두 사람을 통해서 독일 고전주의가 찬란하게 만개하게 됩니다. 실러는 괴테의 도움으로 집필에 착수하여 많은 학문적 예술적 업적을 남깁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폐결핵에 걸려 1804년 일찍 유명을 달리 합니다.

 

 

 

사진은 빌헬르미네 헤르츠리프 (1789 - 1865)라는 이름을 지닌 여성입니다. 1807년 괴테는 자신보다 40세 나이어린 여성과 염문에 빠집니다. 괴테의 나이는 57세이고 그미는 불과 17세의 처녀였습니다. 괴테는 이때의 감정을 소설 "친화력"에 담았습니다. 그미는 작품 속에서 오틸리에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선하고 경건하지만,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그미는 1827년 어느 법률가와 결혼합니다. 후일담이지만 그미는 젊은 시절에 겪었던 나이든 괴테와의 사랑의 경험을 오래오래 간직하였다고 합니다.

 

 

 

 

괴테는 에커만이라는 비서를 고용하여 모든 것을 구술하고, 그로 하여금 받아쓰게 하였습니다.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은 에커만의 노력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음악에서 악보를 넘기는 자를 페이퍼 터너 Papier Turner라고 합니다. 연주자는 연주하느라고 악보를 손으로 넘길 겨를이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사람이 페이퍼 터너, 혹은 파피어벤더 Papier-wender는 연주자와 호흡이 맞아야 합니다. 악보를 잘못 넘기면, 연주자는 매우 당황스러워할 것입니다. 에커만 역시 괴테를 도와서 책을 완성하였습니다. 에커만은 제 2의 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페터 가스트라고 하는 페이퍼 터너가 존재했듯이 말입니다.

 

 

 

 

괴테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때 머물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그는 작품을 구상할 때 혼자 이곳에 들렀을 것입니다. 그가 남긴 문화적 유산은 참으로 지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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