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횔덜린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필자 (匹子) 2021. 6. 12. 11:36

횔덜린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은 1797년에서 1800년 사이에 씌어졌으며, 시인이 사망한 뒤에야 (1826년) 발표된 미완성 드라마이다. 세편의 원고 가운데 제 2고만이 "Der Tod des Empedokles. Ein Trauerspiel in fünf Akten"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실제로 BC. 5세기 (지금은 시칠리아의 아그리겐트인) 아크라가스 출신의 고대 철학자, 시인, 의사 그리고 정치가이다. 횔덜린은 1797년 곤타르家에서 작품을 구상하였으나, 제 2막에서 집필을 중단하였다. 1798년 그는 홈부르크에서 제 2고를 착수하였으며, 제 3고에서 근본적 수정을 가했다. 횔덜린은 친구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엠페도클레스는 역사극도 아니고, 고대 철학의 충실한 재현도 아니”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엠페도클레스를 묘사함으로써 “시인은 민중의 교사이며, 계몽자일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일이었다.

 

 

 

 

 횔덜린의 초상화

 

 

제 1 원고: (미완성 원고들 가운데에서 가장 길다.) 엠페도클레스는 아크라가스에서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의 이상은 한마디로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며, 조화와 아름다움을 바람직한 국가 내에서 실현하는 과업이었다. 그러나 아크라가스의 실제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이는 횔덜린이 체험하였던 시대적 현실 (슈바벤 지방의 폭정)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일상의 고난에 시달리며 살아갈 뿐이다. 아크라가스의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민족이었던 것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제자, 파우자니아스의 충동으로 사람들은 엠페도클레스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려고 하나, 그저 전통적 지배 체제 속에서 그를 신 하나의 왕으로 이해할 뿐이다.

 

 

 

 

횔덜린이 30여년동안 칩거해서 살던 튀빙겐 탑의 건물

 

 엠페도클레스는 일갈한다. “왕들의 시대는 이미 끝났네.” “그대들이 왕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라. 너희는 너무 늙었다. (...) 만약 너희가 자신을 돕지 못한다면, 아무도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나쁜 왕을 선한 왕과 대치시키려는 노력은 진부하다는 것이다. 엠페도클레스가 그곳에서 지도력을 얻게 되자, 기득권을 누리던 폭군, 헤르모크라테스와 갈등을 빚는다. 폭군은 엠페도클레스를 추방한다. 주인공은 그의 제자들과 에트나 산을 배회하다가 분화구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다. 그러니까 경직된 썩은 사회에서 두려움에 떨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제 2 원고: 드라마의 줄거리는 제 1 원고와 커다란 차이를 지니고 있으나, 신화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엠페도클레스의 목표는 인민들에게 신과 같은 자연, 조화로운 천국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전해주는 일이었다. “때로는 죽는 자의 가슴은/ 마치 죽은 그릇 속에서 잠들고 있다./ 좁은 충동에 피곤하게 될 때까지.../ 낯선 냉혹한 곳에서 정신은 마치 니오베에 갇힌 듯/ 모든 전설보다 더 막강하게 되고 /자신의 근원을 생각하며 살아있는 아름다움을 찾으며/ 순수한 현재 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발전시키게 되는 것/ 이게 오랫동안 결여했던 좋은 신들이리라.

 

 

 

엠페도클레스의 모습

 

 

엠페도클레스는 “우리 속의 신 (Gott in uns)”을 강조한다. 이제 인민들은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이기주의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질 게 아니라, 주권을 새로이 지니고, 헌신과 사랑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과 미움은 하나로 통합될 수 있고, 지배와 소외는 극복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민들은 엠페도클레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직 성숙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간극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을 예시한다. 첫째로 엠페도클레스가 혁명적 폭력을 감행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전략적으로) 전통적 의미의 왕과 같은 지도자가 되는 일이다. -횔덜린은 1797년 5월 (집필하기 몇 개월 전에)에 농업 공산주의를 추종하던 혁명가 그라쿠스 바뵈프 (Gracchus Babeuf)가 처형당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폭군, 헤르모크라테스는 엠페도클레스의 딜레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는 현재 상태 (Status quo)를 고수하려고 한다. 엠페도클레스는 폭군과 대결하려고 한다. (그 후에 원고는 중단되어 있음).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은 새로운 개인의 탄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류의 해방은 개인에 의해 이룩될 수 없으나,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민중의 교육자” 엠페도클레스는 역사적 발전의 부호를 전해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결코 비극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제 3 원고: 제 1, 2 원고의 내용을 완전히 변화시킴. 그렇지만 모든 묘사가 신화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틀러 판에 의하면 횔덜린은 1799년 경 슈바벤의 혁명 운동의 궁극적 실패에 참담함을 느끼며 이 글을 집필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제 3원고에서는 자유로운 죽음의 필연성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자연, 평등 사회의 이상적 건설을 위한 전제 조건에 불과할 뿐이다. 구원하는 행위는 인민 혁명에 대한 실례가 아니라, 무언가를 기약하는 희생일 뿐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예언자 마네스 그리고 왕이된 동생, 슈트라토와 격렬한 토론을 벌린다. 예언자 마네스는 과연 엠페도클레스가 자신의 몸을 던져 인간 삶의 모든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심의한다. 한마디로 자연은 제 3고에서 인간 존재의 척도이며,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의 신뢰자이다. 동생 슈트라토가 세운 군주 체제는 인간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브루투스의 칼은 작가에 의하면 더 이상 폭군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작용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페터 바이스) 남은 것은 주인공의 자기 희생적 죽음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