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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프리쉬의 '돈환, 혹은 기하학적인 사랑'

필자 (匹子) 2021. 3. 5. 19:15

친애하는 M, 오늘은 막스 프리쉬 (Max Frisch, 1911 - 1991)의 희극 작품 ?돈환 혹은 기하학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1953년 5월 5일 취리히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습니다. 나중에 작가는 제 3막 후에 이어지는 막간극 그리고 가브리엘 텔레즈 (1571 - 1648)의 “돈환” 공연에 대한 논평 등을 삭제합니다. 기이한 패러디를 동원하여 프리쉬는 다음의 사항을 은근히 드러냅니다. 즉 돈환은 여성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남자가 아닙니다.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채 세상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우울한 사내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프리쉬의 돈환에게는 성욕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치되는 정신을 드러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돈환은 “남성적 기하학”을 사랑합니다.

 

돈환은 한마디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멋쟁이도 아니며, 근육질의 헤라클레스도 아닙니다. 그는 한 명의 지식인일 뿐입니다. 그는 여성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성이라는 존재는 주인공에게 삶의 경미한 부분으로 간주될 뿐입니다. 그렇지만 돈환은 여성을 경멸하는 태도로 인하여 자신의 전체적 삶을 망치게 됩니다. 친애하는 M, 돈환은 수학자이자 장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여성으로부터 얻은 게 별로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도나 안나와 결혼시키려 합니다. 그미는 기사 수도회장 돈 곤찰레스 그리고 도나 엘비라의 딸입니다.

 

막이 오르면, 결혼식 전야제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전야제는 가면무도회의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돈환은 질서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분위기를 몹시 싫어합니다. 그는 친구 로드리고에게 식장을 떠나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로드리고는 이를 거절합니다. 결국 주인공은 혼자 탈출하여, 그날 밤에 공원을 헤매다가 어느 묘령의 여자를 사귀게 됩니다. 친애하는 M,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당신은 짐작하시겠지요? 그 다음날 결혼식은 디에고 신부의 주례로 거행됩니다. 신랑과 신부는 식장에서 상대방에 대해 커다란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돈환과 도나 안나는 전날 밤 공원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돈나 안나는 이를 매우 뜻 깊게 생각하지만, 돈환은 지킬 수 없는 결혼 서약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순간적 사랑은 용납될 수 있으나, 지속적 사랑은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혼례는 성사됩니다.

 

그날 밤 돈환은 신부를 피해 어디론가 도주합니다. 한 여자에게 매여 살아간다는 것은 돈환에게 고통을 안겨줍니다. 주인공은 친구 로드리고의 신부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가 도망친 곳은 다름 아니라 곤찰레스와 엘비라의 방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돈환은 자신의 욕정을 달래기 위해서 친구의 여자를 유혹한 게 아니라, 자신의 신부에게 여성은 얼마든지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돈환은 친구 로드리고와 결혼하기로 되어있는 신부의 얼굴을 드디어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미는 놀랍게도 도나 안나가 아닌가요? 돈환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릅니다. 이때 그미는 욕정에 사로잡힌 암코양이처럼 그의 옷을 벗기려고 합니다.

 

이때 돈환은 정색하면서, 그미의 손을 밀쳐버립니다. 그러면서 그는 도나 안나에게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사실인즉 친구 로드리고의 여자를 유혹하려고 한 게 아니라는 점, 여성에 대한 돈환의 사랑은 순간적이라는 점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때 도나 안나는 깔깔거리고 웃습니다. 그미는 나직한 소리로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자신은 도나 안나가 아니며, 창녀 미란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돈환은 몹시 놀라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은 창녀 미란다를 도나 안나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돈나 안나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연못에 빠져 죽습니다. 조만간 사람들은 그미의 시체를 연못에서 건져 올립니다.

 

친애하는 M,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하시겠지요?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나 안나는 오래 전부터 로드리고를 사랑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그미는 부모의 뜻대로 돈환과 원하지 않는 결혼식을 올려야 합니다. 도나 안나는 극도의 절망감에 사로잡혀 연못에 빠져 죽습니다. 문제는 비극적 죽음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는 데 있습니다. 로드리고 역시 그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고, 로드리고의 아버지는 자식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사망하고 맙니다. 비보를 접하게 된 돈환은 망연자실합니다. 결국 그는 하늘에 대고 고함을 지릅니다. “그래, 하늘이여. 당신과 나 둘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들을 조소하는지 두고 봅시다.”

 

돈환은 몇 년간을 뻔뻔스럽고 방종하게 살아갑니다. 이제 그는 33세가 되었습니다. 돈환은 이제 모험적인 삶 그리고 가난에 대해 싫증을 냅니다. 주인공은 시종 레포렐로와 함께 코르도바 주교를 찾아갑니다. 돈환은 방종하고 뻔뻔스러운 자의 지옥행 이야기를 자신의 체험담으로 주교에게 들려줍니다. 이로써 자신의 이야기가 주교에 의해 전해져서 연극 무대에서 공연될 수 있도록 조처합니다. 대신에 돈환은 수도원의 방 한 칸을 얻어서 살아가게 해달라고 주교에게 부탁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은 “여성들로부터 벗어나 조용하게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돈환은 하나의 계획을 세웁니다. 즉 자신에게 버림받은 모든 여인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게 그 계획이었습니다. 향연은 홍등가의 대모인 첼레스티나에 의해 준비됩니다. 바로 이 자리에 주인공에 의해 살해된 기사 수도회장이 모습을 드러내어, 번개 불과 유황 연기 속에서 주인공을 지옥으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친애하는 M,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코르도바 주교는 주교가 아니라, 복수심에 불타는 남자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주교는 사랑하는 애인의 정조를 빼앗은 돈환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주교로 가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증인들은 이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돈환은 모든 것을 체념하며, 부유한 공작 부인 론다와 결혼하게 됩니다. 론다는 옛날에 돈환을 속였던 창녀 미란다, 바로 그미였습니다. 그미는 오래 전부터 돈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돈환은 뭍 여성들보다도 오로지 “정신과의 유희를 더욱 즐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론다는 주인공에게 한 가지를 약속합니다. 즉 돈환은 앞으로 그미의 성에 칩거하게 될 것이며, 어느 누구도 주인공의 기하학 연구를 방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돈환은 황금빛 찬란한 감옥에서 살아갑니다. 어느 날 론다는 돈환에게 아기를 낳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결국 론다와의 살 섞기는 주인공 자신의 목에 자살의 끈을 동여매게 작용합니다. 세비야 극장에서는 돈환의 지옥 여행에 관한 드라마가 공연됩니다.

 

친애하는 M, 당신은 이 극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프리쉬는 주인공 돈환이라는 인물을 색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탐탁치 않는 역할을 어쩔 수 없이 떠맡아야 하는 인간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주어진 여건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지성이라는 마스크에 뒤덮인 채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로 인하여 돈환은 여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상실하고, 대신에 기하학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프리쉬는 돈환의 소재를 자신의 고유한 문학적 주제인 “동일성 그리고 역할”에 관한 문제로 변화시켰습니다. 이 점으로 미루어볼 때 프리쉬는 진정한 돈환이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 돈환의 역할 속으로 뛰어든 인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