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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발저의 일각수 (1)

필자 (匹子) 2021. 7. 24. 08:20

마르틴 발저 (Martin Walser, 1927 - )의 "일각수 (das Einhorn)"는 작가의 이른바 “안젤름 크리스틀라인” 삼부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으로 1966년에 간행되었다. 첫 번째 작품 "전반전 (Halbzeit)"은 1960년에, 세 번째 작품 "추락 (Der Sturz)"은 1973년에 각각 발표되었다. 주인공 안젤름은 42세로서 중견 작가로서, 그럭저럭 자신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그는 때로는 강연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때로는 문학 토론에 참가하기도 한다. 일인칭 소설은 주인공의 회상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주인공 “나”는 병들어 있으며, 자신이 어떻게 병이 들게 되었는가를 성찰한다.

 

소설의 발단은 첫 번째 작품 "전반전"의 줄거리를 이어가고 있다. 주인공은 첫 번째 소설을 발표함으로써 여러 사람들과 갈등을 겪는다. 알리사는 첫 번째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안젤름의 아내인데, "일각수"에서는 비르가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비르가는 남편이 구설수에 오르게 되자, 가족을 데리고 슈투트가르트에서 뮌헨으로 이주한다. 뮌헨에서 안젤름은 우연히 의상 축제에 참석하는데, 그곳에서 스위스의 출판업자인 매력적으로 보이는 멜라니 수그를 알게 된다. 취기가 오른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합의하여 하룻밤의 정사를 즐긴다. 다음날 아침 멜라니는 주인공에게 한 가지 사업을 제안한다. 안젤름은 매달 원고료 2000 마르크를 받는 대신에, 육감적인 사랑에 관한 소설을 집필한다는 게 그 제안이었다. 이때 멜라니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즉 안젤름이 절대로 가상적 이야기를 서술해서는 안 되며, 실제 삶에서 발생했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야 하며, 특히 섹스에 대한 묘사를 노골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게 바로 그 조건이었다.

 

이때 안젤름은 내심 노골적인 성 묘사에 대해 회의한다. 육체적인 사랑에 대해 모든 것을 까발린다는 게 순수 작가로서는 불가능하며, 의사가 아닌 다음에야 육체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모든 것을 낱낱이 묘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게 평소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안젤름은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멜라니 수그의 제안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소설의 중심에는 이제 안젤름 크리스틀라인 자신이 서 있다. 주인공은 우선 학창 시절에 만나 일시적으로 성 관계를 맺었던 바르바라 잘처를 기억해낸다. 안젤름은 어느 토론회에서 그미를 알게 되었다. 바르바라는 당시에 부유한 은행가의 애인이었는데, 마조히즘의 성향을 지닌 은행가는 그미에게 돈을 지불하고, 자신을 학대하기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르바라와의 사건은 진척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안젤름은 자신의 과거 행위를 소설로 집필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특히 성행위를 묘사하는 데 체질적으로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는 출판업자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낸다. 껄끄러운 성 묘사를 생생하게 다룰 수 없으니, 출판업자는 작가의 다른 각도에서의 서술 행위를 용인해 달라는 게 편지의 요지였다. 그러나 멜라니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에 노골적 묘사를 위한 좋은 범례로서 그미는 녹화테이프를 글로 옮겨 쓴 어느 원고를 안젤름에게 보낸다. 녹화테이프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 반드시 삽입되어야 한다는 게 답변에 덧붙여져 있었다. 그런데 원고 속에는 놀랍게도 주인공이 멜라니를 만나 함께 지냈던 밤의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는 게 아닌가? 안젤름은 몹시 충격을 받는다.

 

안젤름은 고민 끝에 멜라니와 보냈던 사건을 소설로 집필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해야만 나중에 자신과의 하룻밤의 정사 이야기를 담은 녹취 기록물이 파기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멜라니는 이러한 계획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미는 안젤름으로 하여금 보덴 호수가의 별장에 가서 소설을 집필하도록 조처한다. 주인공이 집에서 글을 쓰려면,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제약을 받는다는 게 하나의 이유였다. 그래서 안젤름은 가족을 뮌헨에 생활하게 하고, 혼자 보덴 호숫가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사탕공장 주인인 한스 블로미히의 별장에 기거하며 집필에 몰두한다.

 

안젤름은 주말마다 찾아오는 멜라니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곤 한다. 어느새 몇 개월이 지나간다. 주인공은 어느 여름의 축제에서 집주인 한스 블로미히와 내연 관계에 있는 로자를 알게 된다. 여름 축제는 주인공이 과거 60년대 초에 서독 문화 정책을 풍자하기 위해서 개최된 바 있는 뮌헨의 의상 축제와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간간이 그는 로자를 집필실로 초대한다. 로자와의 에로틱한 모험은 집필의 권태를 가시게 해준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공 안젤름에게 예기치 못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느 고혹적인 여자에 대해 열정적 연애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미의 이름은 오를리 락스라는 혼혈 처녀였다.

 

오를리는 수리남 출신의 젊고 아름다운 네덜란드 여자였는데, 그미 곁에는 언제나 밤버 프린스라는 사내가 동행하고 있었다. 밤버는 건장한 사내로서 오를리의 남자 친구, 아니면 보디가드인 것 같았다. 안젤름은 어떤 기발한 계획을 세워서, 밤버를 어디론가 멀리 떠나게 한다. 주인공은 집요하고도 은근하게 접근하여, 오를리를 끝내 자신의 애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럼에도 하나의 망상은 주인공의 마음에서 떠날 줄 모른다. 그것은 오를리가 반드시 순결을 지켜야 자신의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다는 망상이었다. 이러한 망상 때문에 주인공은 끓어오르는 욕정을 억누르며, 그미와 동침하지 않는다. 어느 날 오를리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안젤름은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받으며, 뮌헨에 있는 자신의 가족에게 되돌아간다. 안젤름은 자신에 관해 곰곰이 성찰하고, 오를리와의 만남 그리고 모든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하여 주인공이 얻어낸 결론은 한 가지 사항이었다. 즉 과거는 조금도 구조되지 않고 사라졌으며, 기억을 통해서도 재현시킬 수 없다는 게 그러한 침통한 결론이었다. “기억이란 비록 지나간 무엇에 의해 자극 받은 것이지만, 지나간 사실과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다. 이는 쉽사리 인간의 의식에 포착되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 자체가 너무 거창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과잉된 괴물이다. 그것은 우리를 경건하게, 혹은 병들게 만드는 것으로서, 상상력 혹은 판타지라고 일컫는다. 기억을 통해서 인간은 과거를 기괴한 무엇으로 만들어내려고 시도하지 않는가? 다행인지는 모르나 우리의 기억은 부활의 축제를 위한 토대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실들을 측량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안젤름이 계획한 소설은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에 관해 세밀하게 감각적으로 기술하라는 멜라니의 요구는 결코 관철될 수 없다. 주인공 안젤름은 해방된 섹스에 관한 관능 소설 대신에, 결국 사랑을 기술하기 어려움을 다룬 한 권의 책을 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