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생태 공동체와 대아 유토피아 (2)

필자 (匹子) 2020. 9. 20. 11:53

 

(앞에서 계속됩니다.)

 

4.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성: 성과 관련되는 또 한 가지 지배 이데올로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는 인간의 영원한 이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유일무이한 배필과 오랫동안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입센의 「페르귄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며, 언제나 문학 작품을 통해서 아름답게 칭송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배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이상으로서의 결혼 제도를 하나의 근엄한 철칙으로 규정함으로써, 사람들이 인간 삶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자발적인 사랑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차단해 왔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는 옳든 그르든 간에 가부장적 남성 사회의 관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부일처제가 비록 수천 년 전부터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기는 했으나, 하나의 상대적인 관습이라는 사실입니다. 20세기 초 슬라브족의 “자드루가 Zadruga” 공동체는 세금 징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부다처의 제도를 한시적으로 시행했으며, 일본에서는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목숨을 잃자, 형사취수 兄死取嫂의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기원 후 7세기부터 이슬람 종교가 일부다처의 제도를 도입하게 된 까닭은 수많은 과부들의 경제적 삶을 마련하기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제도는 주어진 삶의 경제적 연건과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일부일처제가 오랜 기간 동안 존속된 까닭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지배 이데올로기의 활용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가정 familia”이란 말 그대로 “농부 famulus”의 예속물로서 기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장은 마치 위로부터 내려온 명령을 아래로 하달하는 군대의 상사와 같습니다. 따라서 가부장적 가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층 국가의 위계적 질서를 튼실하게 할 수 있는 하위 그룹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5. 일부일처제, 혹은 가정 없는 여성 공동체: 상기한 사항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유토피아는 두 가지 성향을 표방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결혼제도를 인정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결혼이 사유 재산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혼인을 통한 가정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후자의 경우 가족이라는 체제는 없고, 오로지 아이들과 여성들이 함께 살아가는 여성 공동체의 체제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를테면 모어 Morus, 안드레애 Andreä, 윈스탠리 Winstanley, 모렐리 Morelly, 슈나벨 Schnabel,, 메르시에 Mercier 그리고 카베 Cabet 등은 일부일처제를 통한 가정 구도를 하나의 바람직한 제도로 채택한 반면에, 플라톤 Platon, 캄파넬라 Campanella, 푸리에 Fourier, 데자크 Dejaque 그리고 로시 Rossi 등은 혼인을 통한 가족 체제를 폄하하고, 가정이 없는 여성 공동체가 좋은 대안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 모두를 채택한 문학 유토피아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예를 레스티프 델라 브레톤 NRestif de la Bretonne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사랑의 삶에서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일부일처제 하나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6. 두 가지 사랑의 삶은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부일처제 그리고 결혼 없는 여성 공동체의 삶의 방식 가운데 한 가지가 좋고 다른 한 가지가 나쁘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단점에 관해서 말해봅시다. 이를테면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주의의 경우 이혼한 여성들이 새로운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장치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는 매춘이 은밀하게 퍼져 있어서 특히 남성들이 성매매에 관여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로 인한 여성 차별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여성 공동체의 경우 성의 질서가 없기 때문에 개개인이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여러 명의 성적 파트너를 지닐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일부다처제를 용인하는 이슬람 사회에서는 남자들은 여러 명의 여성을 거느리지만, 여성들은 이러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아가 여성 공동체의 경우 아이들과 아버지 사이의 유대 관계가 끈끈하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가 배제된 유아 교육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7. 사랑의 길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생태 공동체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간에 상호 아무런 부담 없이 사랑의 파트너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공동체 내에서는 매춘도 존재하지 않고, 성폭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푸리에의 팔랑스테르 공동체의 경우 본인이 원할 시에 2개월마다 성의 파트너를 교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남자만 자신에게 맞는 파트너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여성에게도 그러한 선택이 처음부터 동등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물론 공동체에 속하는 두 명의 남녀가 오랜 기간 함께 동거하기를 원한다면, 공동체는 이를 허용합니다.

 

공동체 내에서는 여러 명의 남자가 한 명의 여자를 사랑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고, 여러 명의 여자가 한 명의 남자를 사랑하기도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공동체 사람들은 소유에 대한 감정 그리고 질투에 대한 감정을 이성적으로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사랑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파트너의 선택에 있어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강제적 성윤리가 존속하는 남한에서는 이러한 생활방식이 매우 부도덕하게 비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일견 난잡하게 보이는 일부다처제 내지 다부일처제의 생활 방식을 통해서 가장 성숙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고 푸리에는 주장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