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신화와 유토피아, 그 일치성과 불일치성 (3)

필자 (匹子) 2022. 4. 8. 16:26

(앞에서 계속됩니다.)

 

9. 신화적 역사적 유형의 파멸 이론: 신화적 역사적 유형의 파멸 이론을 내세운 사람 가운데 우리는 헝가리 출신의 신화 연구가 카를 케레니 Karl Kerényi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케레니는 쇼펜하우어, 바흐오펜 그리고 니체의 시민주의 역사 이론을 탐구하면서, 역사 발전이 진보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황금의 시대에서 철의 시대로 끝없이 나락해나간다는 것을 확인해내었습니다. 그의 이론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정당한 논거를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케레니의 신화 연구가 마르크스주의 신화 연구가 조지 D. 톰슨 George D. Thomson과는 반대로 “찬란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인간의 갈망”을 반영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물론 신화 연구가 가운데에는 과거의 찬란한 삶을 동경하여, 최상의 삶의 조건들을 찾으려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주어진 현재를 하나의 파국으로 설정하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역사를 비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시도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이들의 자세 속에 처음부터 부분적으로 찬란한 과거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이 자리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19세기 중엽에 출현한 마르크스의 진보 이론을 처음부터 부정하고, 시민 사회의 이상을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하려는 과거 지향적 반동주의를 고수하는 자세입니다. 고대 사회가 계층사회 내지 노예 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10. 신화는 학문적 논의로 밝혀질 수 없다: 그밖에 신화들은 엄밀히 따지면 학문적 논의로 명징하게 밝혀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신들의 이야기들로서 합리적 논의를 거쳐서 진리로 확정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헤시오도스의 이야기는 세계의 탄생, 신들의 행위와 업적 그리고 자연과의 상호 관련성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화는 세계의 근원을 우화적으로, 다시 말해서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서술하며, 세계가 신의 의지의 소산이라고 해명합니다.

 

신화적 관점에서 고찰하면 세계는 무엇보다도 신의 의지에 의해 탄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와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숙명론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신(들)의 권능 내지 인간 세계에 대한 그(들)의 권한이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주어진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감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사회 유토피아는 세계를 사회정치적 측면에서 합리적 구도로써 설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으며, 얼마든지 파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유토피아는 근본적으로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회 유토피아에는 신들이 처음부터 개입되지 않으므로 신의 영향력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 점이 유토피아와 신화 사이의 첫 번째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1. 유토피아와 신화 사이의 차이점 (2): 신화와 유토피아 사이의 두 번째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즉 신화는 대체로 과거 지향적이고 수동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유토피아는 미래지향적이고 능동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황금의 시대에 관한 신화를 유토피아의 사고의 이전 형태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황금의 시대 혹은 에덴동산에 관한 신화는 인간의 상상에 의해서 출현한 상이지만, 주어진 시대에 대한 반대급부로 떠올린 상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찬란한 삶에 관한 갈망은 신화 속에도 수동적으로 반영되고 있는데, 이는 주어진 시대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신화를 떠올린 당사자의 구체적인 현실이 어떠했는지 학문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화를 생각해낸 태고 시대의 현실에 관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다시 말해서 모든 문헌을 찾아내어 그것을 고증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고대인들이 자신의 이상을 과거로, 다시 말해서 태고 시절로 이전시켜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인간의 원초적 행복은 노동과 강제노동이 전혀 필요 없는 태초의 시점으로 되돌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찬란한 삶은 무조건 과거의 시간으로 이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실도피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태초의 시대를 막연하게 과거 지향적으로 동경해 왔습니다. 이후의 장에서 자세히 설명되겠지만, 유토피아는 찬란한 삶을 수동적으로 추구하는 태도와 전적으로 다릅니다.

 

12. 유토피아는 미래로 향하는 능동적 시각의 상을 제시하고 있다: 나중에 자세히 언급되겠지만,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예를 약술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모어는 과거 지향적인 시각 대신에, 찬란한 삶을 위하여 앞으로 향하는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견지합니다. 유토피아라는 섬은 16세기 영국의 주어진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의 상으로서, 합리적 질서의 상으로 축조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비록 제한된 능력이지만,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권리를 되찾으려고 시도합니다.

 

합리적 구도에 의해 설계된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의 시대 비판 및 미래 사회에 대한 선취의 상으로 이해됩니다. 그러한 한 미래로 행하는 유토피아의 시각은 과거로 향하는 신화적 시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신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에덴동산과 같은 천국의 삶이라든가 황금의 시대를 막연히, 과거 지향적으로 그리고 수동적으로 동경합니다. 이에 반해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미래 지향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는 신화의 특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예외적 사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찬란한 태초를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려는 계몽주의의 유토피아라든가 황금의 시대를 바탕으로 미래의 구원을 갈구하는 천년왕국의 기대감은 근본적으로 신화적 내용을 과거 지향적이고 수동적으로 고찰하려는 퇴행 Regression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항 말입니다. 그것은 목표로서의 선취의 상을 황금의 시대로 설정하지만, 과정 내지 수단으로서 미래의 더 나은 삶을 적극적 자세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속에서 미래를 찾으려는 방법론으로서의 양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년왕국의 기대감은 신화적으로 착색되어 있으나, 의향에 있어서는 부분적으로 유토피아의 성분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현재를 하나의 파국으로 설정하고, 과거의 찬란한 삶을 수동적으로 동경하는 패배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13. 유토피아와 신화 사이의 차이점 (3): 셋째로 유토피아의 문헌을 연구하는 사람은 문헌의 발표 시점을 중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의 상에서는 저자가 처한 현실적 모순이 어느 정도 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유토피아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주어진 사회의 결핍된 사항”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결핍의 상태에서 어떤 무엇을 갈구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는 비록 겉보기에는 휘황찬란할 정도로 기발한 면모를 드러내지만, 속으로는 작가가 처해 있는 처참한 현실상을 비판적으로 염두에 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화의 경우 이를 고증할 문헌이 많이 부족하므로, 사람들은 특정 신화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출현했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신화는 문헌에 의해 전해 내려오는 게 아니라, 구전된 이야기로서 그 속에는 신의 권능과 관련된 초시대적 알레고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화를 바탕으로 신화가 탄생한 현실의 구체적 문제점을 도출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신화의 경우 저자가 불분명하고, 신화의 출현의 시점과 그 배경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