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1.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무신론자들의 공화국: 실제로 퐁트넬은 유럽의 사회를 비참하고 혼돈스러운 현실로 규정하고, 낯선 미지의 섬을 갈등이 없는 이상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아자오 사람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마치 형제자매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서로 협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웃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타인에게 봉사하는 데 대해 매우 기뻐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아자오 주민들은 상호부조 협력의 정신을 고수하면서 살아갑니다. 토마스 모어와 베라스는 함께 모여서 살아가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가려면, 균등하게 형법을 적용하고 도덕적 규범과 가치를 어긴 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퐁트넬은 불과 23의 나이인데도 이러한 처벌과 보복의 정당성을 뛰어넘는 놀라운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즉 퐁트넬의 유토피아에서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항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에 대한 깊은 신앙심은 평화로운 공동의 삶에 대한 필연적인 도덕적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퐁트넬은 이렇게 주장하면서, 유럽에 거주하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의 극악무도한 패륜과 폭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무신론자들의 어떤 공화국이 어쩌면 기독교 윤리에 근거한 유럽 국가들보다도 훨씬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법 규정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 종교 비판과 하나의 자연적인 도덕: 퐁트넬이 유토피아의 이상 국가를 설계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즉 최상의 국가의 규범적 토대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철학자 피에르 벨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차적으로 종교 이데올로기를 비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벨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공리를 받아들이고, 이를 과감하게 칼뱅과 가톨릭 사상의 신학적 토대에 적용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첫째로 인간은 어떤 특정한 사실에 대해 한 점의 의혹을 지니지 않아야만, 적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로 (종교적) 감정을 증명해내는 일은 그 자체 전적으로 무가치하다고 합니다, 셋째로 증명 가능한 명백성을 도출해내지 않는다면, 어떠한 다른 견해를 수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퐁트넬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피에르 벨처럼 도덕적 기준을 신학과 신앙으로부터 일탈시킨다면, 인간의 협동적 삶을 위해서는 과연 어떠한 원칙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말입니다.
퐁트넬은 아자오 사람들의 세계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 하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로부터 어떤 무엇의 존재가 도출될 수 없다.”는 사항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좋게 대하기를 원한다면, 너 역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라. Traitez les autres comme vous voudriez qu’ils vous traitassent”는 사항입니다. 첫 번째 원칙을 통해서 어떤 개별적 신에 대한 믿음은 고유한 토대를 상실하게 됩니다. 두 번째의 원칙은 계시록에 근거하는 종교적 믿음을 어떤 자연적인 도덕으로 대치시키도록 작용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적인 도덕이란 이를테면 어느 집단의 가장이 가족 구성원들을 저녁에 모아놓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떠한 의무를 지켜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이로써 미덕이란 더 이상 신에 의한 계명으로 규정되지 않고, 순수하게 사회적 측면에서 규정되고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이 됩니다.
13. 이성과 자연의 원칙: 만약 사회 유토피아를 설계하는 데 있어서 계시록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을 배제한다면, 이는 국가의 형성 및 문명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어떻게 작용하게 될까요? 물론 여기서 분제가 되는 것은 반국가주의적인 지배 없는 공동체의 설계가 아니라, 고전적인 “국가주의적인 archistisch” 틀의 설계입니다. 토마스 모어는 고대의 전통을 수용하여 최상의 국가를 건설한 한 명의 가부장을 맨 처음 내세우고 있습니다. 가부장은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최상의 국가의 이성적인 법을 초안함으로써 사회 유토피아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퐁트넬의 경우는 이와는 다릅니다. 이상적 공동체는 한 개별적 인간에 의한 게 아니라, 인민 전체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자오 인민들은 국가의 초석을 닦은 자가 누군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종파도, 하나의 정당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에 성스러운 책자를 읽지 읽었거나, 성문화된 법을 접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자오 사람들이 지닌 것이라고는 오로지 이성 내지 자연의 품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원칙뿐입니다. 이러한 원칙에는 어떠한 의혹도 없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원칙을 지킬 뿐입니다.
14. 예식, 사원 그리고 사제 없는 국가: 이렇듯 아자오 섬의 국가는 민주적이면서 공동체적인 특성을 처음부터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민이 개별 인간들의 집합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개개인이 하나의 계약의 틀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처음부터 하나의 공동체 속의 구성원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곳 섬에 존재하는 이상적 국가의 토대는 -오늘날 언급되고 있는- 주체의 자연법에 입각한 자율적인 자아에 의해서 성립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공동체적 이성에 의해서, 다시 말해 만인에 의해 명백하게 이해되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시적인 자연은 생명의 창조자입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자연을 비개인적 신으로 공경하며 살아갑니다. 사멸되지 않는 영원한 자연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였는데, 이러한 무신론적 사고는 어떠한 예식, 어떠한 사원과 사제를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아시아 및 다른 대륙에서 존재하는 종교적 편견과 미신으로부터 자유롭게 처신하면서 무신론에 입각한 국가를 건립하였습니다. 요약하건대 인민 공동체 전체는 자연의 질서를 바탕으로 하나의 이상적 국가를 건설하였는데, 이 속에는 반-개인주의, 다시 말해서 더 큰 자아의 사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15. 아자오의 외부적 환경: 경제적 기술적 측면에서 고찰할 때 아자앵 국가는 서구 문명에 비해서 몹시 낙후해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곳 사람들의 자연 친화적인 삶을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아자오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배를 타고 다니는데, 배는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카누와 유사하게 생겼습니다. 아자오는 농업 국가라는 점에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흡사합니다. 섬에는 여섯 개의 도시 공화국이 있습니다. 모든 건축물은 합리적으로 건립되어 있습니다. 도시는 제각기 여섯 개의 삼각형으로 분할되어 있고, 모든 지역마다 600개의 집이 있습니다. 한 집에는 스무 가구가 거주합니다. 모든 가옥들은 동일한 크기로 삼층으로 축조되어 있습니다. 농경지 역시 놀라울 정도로 기하학적 방법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가옥과 농경지가 이러한 방식으로 대칭을 이루고 동일한 크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독자는 여기서 현대 문명의 공동체의 토대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토대는 16세기 몽테뉴가 이상적으로 묘사한 바 있는 고결한 원시인의 사회적 환경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16. 아자오의 경제적 측면: 모든 땅은 국가의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국가는 경작지를 모든 가족들에게 분배하여 곡식을 수확하게 합니다. 중앙집권적인 관청은 국가의 계획 경제를 담당하는 기관인데, 도시와 시골의 땅 그리고 개별 노동자의 수 등을 통계 자료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수확된 곡식들은 이 관청의 공무원들에 의해서 공정하게 분배됩니다. 물론 공동 소유의 원칙은 토지와 땅에 적용됩니다. 농업, 광산업을 위한 땅 그리고 노예의 노동력 그리고 일부 생산품 등은 공동의 소유입니다. 그밖에 다른 생산품들, 특히 수제품들은 사유재산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모어, 캄파넬라, 베라스의 이상 공동체의 경우 모든 생산품들이 공유 재산으로 귀속되는 것을 고려하면, 퐁트넬의 유토피아는 독특합니다. 아자오는 농업 중심의 국가입니다. 이곳은 날씨가 좋아서 1년에 삼모작이 가능합니다. 농사에 도움을 주는 것은 가축들입니다. 소는 농사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이곳 사람들에게 양질의 고기를 제공합니다. 양의 털은 옷감의 원자재로 사용됩니다.
(계솏 이어집니다.)
'32 근대불문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박: (5) 퐁트넬의 '아자앵 이야기' (0) | 2023.05.04 |
---|---|
서로박: (4) 퐁트넬의 '아자앵 이야기' (0) | 2023.05.04 |
서로박: (2) 퐁트넬의 '아자앵 이야기' (0) | 2023.05.02 |
서로박: (1) 퐁트넬의 '아자앵 이야기' (0) | 2023.05.02 |
서로박: (2) 모렐리의 '자연 법전' (0) | 2023.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