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소크라테스:
브레히트는 불가지론을 거부하였습니다. 인식하려는 인간의 지적 노력은 사물의 본질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고대의 소피스트들은 마치 아는 체하며, 사물의 본질은 인식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다른 소피스트들을 공격했습니다.
K씨는 소크라테스를 역시 수많은 소피스트들 가운데 한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발언 역시 근본적으로 고찰할 때 불가지론을 부분적으로 용인하기 때문입니다. “사물의 본질은 전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그렇지만 무지에 대한 인식만은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나온 것이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는 명제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후 수천 년 동안 하나의 진리로 전해내려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K씨에 의하면 너무나 커다란 박수갈채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계속 다음과 같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즉 “왜냐하면 나는 아무 것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M, 브레히트의 인식론은 그 자체 자명합니다. 공부를 하면, 진리를 인식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진리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10) 자연스러운 소유욕:
번역본에는 “본능적 소유욕”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오역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의미하는 소유욕은 “본능적”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natürlich)”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이라고 함은 그 자체 비이성적인 어감을 품기 때문에 타당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K씨는 어떤 어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이슬란드의 남쪽 지역에는 어민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바다에 부표를 띄워 바다를 분할합니다. 이들에게는 바다 그리고 바다를 유영하는 물고기들이 자신의 소유물들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로써 K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소유욕은 소유물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재산을 나누고, 사유 재산을 철저히 구분하며, 재산 부풀리는 일에 골몰하는 욕구 등이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인간에 대한 브레히트의 성선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로티우스에 의하면 인간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고대에 자연력으로부터의 위험을 막기 위하여, 인간은 서로 뭉쳐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홉스는 반론을 제기하며, “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이다. Homo homini lupus”라고 주장했지요. 당신은 이것 가운데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시는지요?
(11) 상어들이 사람이라면:
친애하는 M, 이것은『코이너씨의 이야기』에서 가장 긴 텍스트이지만, 당신을 위해서 가장 간략하게 기술할까 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독일어 접속법 2식을 공부하는 데 적합한 텍스트입니다. 브레히트는 상어의 비유를 통하여, 이데올로기의 술수 내지 횡포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하나의 물고기 통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국가, 학교, 예술 그리고 종교 모든 것이 권력자의 이용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약 상어들이 사람이라면 그들 역시 인간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작은 물고기의 거주지, 음식, 편안함 등을 돌보아 줄게 될 것입니다. 상어들은 작은 물고기의 건강, 교육 등을 도모해주면서, 그들에게 복종, 믿음, 희생정신과 같은 도덕적 계명을 가르쳐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작은 물고기들로 하여금 전쟁을 치르게 하고 그들 사이의 평등을 철폐하며 계층과 계층 사이의 차이를 공고히 하는 데 앞장서게 될 것입니다. 또한 상어들은 물고기들이 신봉하고 찬탄하게 될 종교와 예술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독자들은 지금까지 인간이 이룩한 문화적 결실 자체가 이미 계층과 계급의 차이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혹자는 1940년 시기에 활약했던 파시스트의 선동선전 전략을 비판하기 위해서 집필된 텍스트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은 일반적인 판단이 아닐까요? 전체주의의 폭력이 자리하는 모든 곳에서는 이 텍스트는 유효한 게 아닐까요?
(12) 목적에 봉사하는 자
번역본에는 “목적”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Der Zweckdiener”라는 제목은 “목적에 봉사하는 자”라고 번역되어야 타당합니다. 나아가 여기서 “목적”이란 하나의 궁극적 목적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허황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집에서 축음기를 틀어놓고 음악을 듣습니다. 이는 체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체조 행위는 힘세어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힘세어지면 그자는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적을 물리쳐야 그자는 먹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K씨는 “그자는 무엇 때문에 먹는가?” 하고 기상천외한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밥그릇” 앞에서 늑대가 됩니다. 독일인과 일본인들은 생존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항변합니다. 마치 초원의 사자가 불쌍한 양떼를 잡아먹듯이,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먹고 산다는 게 인간 삶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요? 약육강식의 삶이 정당화된다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 어디 있겠습니까?
(13) 굶주림:
나라의 삶에 관해서 누군가 K씨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때 K씨는 “나는 어디서나 굶주릴 수 있어요.” 하고 대답한다. 이때 누군가 “당신에게는 먹을 게 있는데, 굶주린다는 것은 무슨 말이지요?”하고 예리하게 따집니다. 이때 K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아마 나는 원한다면 굶주림이 지배하는 어디서나 살 수 있다고 말하려 했을 거요. (...) 내가 굶주린다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굶주림이 지배하는 걸 내가 반대하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어디서나 굶을 수 있다.”는 말은 “굶주림이 지배하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서나 살 수 있다.”는 말과는 약간 다릅니다. 전자는 주관적 입장 내지 개인의 정황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후자는 개인적 상황 뿐 아니라, 어떤 사회적 정황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이 굶주리는 문제는 특정한 나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리는 문제와 별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일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약간의 특권을 누리면서, 끼니를 챙겨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K씨는 의도적으로 “굶주림이 만연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살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어디서나 굶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끔찍한 실상을 폭로하는 자에게 더욱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곤 합니다.
친애하는 M, 지금까지 당신을 위해서 개별 텍스트를 읽고, 이에 관해서 언급해 보았습니다. 이제 다른 텍스트 그리고 상기한 텍스트에 대한 비판은 당신의 몫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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