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근대영문헌

서로박: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 (2)

필자 (匹子) 2019. 1. 15. 22:11

 

친애하는 N, 왜 인간은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일을 무수히 반복할까요? 어째서 인간은 비극적 체험을 겪은 다음에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날까요?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사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생각해 보세요. 늙은이들은 대체로 어떤 무엇을 깨닫는 순간 사망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다시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렇기에 속담에 의하면 “환갑 나이에 인간이 되고, 진갑 나이에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극작품의 전반부는 이로써 절망과 비극의 이야기로 끝맺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3막의 말미에는 아기인 페르디타가 극적으로 구출되는 장면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3막의 마지막 대목에서 어떤 동화적인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이것은 극중 진행과정의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합니다.

 

안티고누스는 시종 한 명과 함께 강보에 싸인 아기를 데리고 유럽 본토로 향합니다. 왕의 충직한 신하로서 공주를 어디엔가 버리고 오라는 왕명을 수행하려고 했지요. 여행의 도중에서 안티고누스는 어떤 기이한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헤르미오네가 나타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히 다음과 같이 부탁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딸아이를 보헤미안 지방의 해안에 데려다주라고 말입니다. 안티고누스는 불쌍한 왕비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보헤미안으로 향합니다. 보헤미안 지방의 어느 언덕에서 그는 성난 곰의 습격을 당해서 목숨을 잃습니다. 안티고누스의 시종은 주인을 타향의 땅에 묻은 뒤에 아기를 안고 목적지로 향합니다. 어느 아침 시종이 풀밭에 아기를 눕혔을 때, 갑자기 폭풍우가 들이닥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시종은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합니다. 강보에 싸인 아기는 풀밭에서 철없이 울다가 어느 양치기에 의해서 구출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비극적 요소와 희극적 요소가 뒤섞이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죄 없는 갓난아이가 구출되는 장면은 지금까지 파괴적으로 진행되었던 극적 과정을 상쇄해주기에 충분하니까요.

 

 

 

 

 

 

 

 

제 4막의 1장은 16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려줍니다. 강보에 싸여 있던 아기, 페르디타는 어느새 어엿한 처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폴릭세네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레온테스 왕에 의해 독살당하지 않은 채 도주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옵니다. 폴릭세네스는 보헤미안의 왕으로 살아가면서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하나를 거느립니다. 플로리첼이라는 등장인물이 바로 그의 아들이지요. 플로리첼은 어느 날 순진무구한 양치기의 딸과 만나게 되고, 그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보헤미안의 어느 마을에서 축제가 개최됩니다. 농부들은 풍족한 삶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최소한의 행복을 즐기면서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축제가 시작되자, 농촌의 선남선녀들이 함께 어울려 유희를 벌입니다. 페르디타 역시 젊은이들과 어울려 즐겁게 춤을 덩실덩실 춥니다. 보헤미안의 따뜻하고 목가적인 분위기는 레온테스 왕이 다스리는 시칠리아의 냉혹한 궁정 세계와는 전혀 다릅니다.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에 플로리첼은 하나의 계획을 꾸밉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티 없이 아름다운 페르디타와 첫날밤을 보내는, 이른바 도둑 결혼식을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폴릭세네스는 자신의 측근을 통해서 아들의 계획을 교묘하게 접하게 됩니다. 축제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이 왕이라고 공언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왕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페르디타의 양아버지인 나이든 산지기는 그제야 비로소 딸에게 구혼하려는 사내가 왕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왕은 세 사람 (아들, 페르디타 그리고 양치기)에게 위협을 가하면서, 결혼은 결코 성사될 수 없다고 공언합니다. 그의 분노는 순간적으로 마치 레온테스의 질투심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극에 달해 있습니다. 여기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은 다시 한 번 첨예화됩니다. 마치 레온테스가 자신의 딸을 추방시키려고 했듯이, 폴릭세네스는 자신의 아들이 천한 여성과 혼인하지 못하도록 그의 발에 족쇄를 채우려고 합니다. 플로리첼은 적어도 자신이 보헤미안에서 살아가는 한 자신의 사랑을 도저히 실천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어느 날 그는 몰래 왕궁을 빠져나와 페르디타를 찾아옵니다. 이때 플로리첼은 함께 보헤미안을 떠나자고 애인에게 제안합니다.

 

 연극의 결말은 놀랍게도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카밀로는 언젠가 레온테스 왕의 책사로서 독살의 명을 어기고 폴릭세네스와 함께 보헤미안으로 도주하여 폴릭세네스 밑에서 신하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페르디타가 레온테스의 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카밀로는 보헤미안 지방을 탈출하여 타국에서 살아가려는 두 남녀를 데리고 시칠리아의 왕궁으로 향니다. 레온테스 왕은 16년 동안 마치 현자로 살아가다가, 이미 죽었다고 믿었던 자신의 딸과 재회하게 됩니다. 페르디타 역시 책사를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떠한 과정으로 양치기의 딸로 성장했는지를 전해 들은 뒤에 아버지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립니다.

 

폴릭세네스 역시 아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카밀로를 추적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시칠리아의 왕궁에 발을 디딥니다. 폴릭세네스는 지금까지의 모든 내막을 전해 들은 다음에 두 사람의 결혼을 마침내 허락합니다. 왕궁에는 기쁨의 탄성이 가득 차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은 즐거운 소식에 어쩔 줄 모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이미 사망한 안티고누스의 부인, 파울리나는 모든 사람들을 헤르미오네의 동상으로 데리고 갑니다. 동상의 베일이 벗겨지자, 거기서 놀랍게도 하얀 옷을 입은 헤르미오네가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미는 16년의 세월 동안 그곳에 숨어서 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은 로버트 그린 (Robert Green)의 소설 『판도스토 (Pandosto)』(1588)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판도스토 (레온테스)는 마지막 대목에서 꿈에 그리던 자신의 딸과 상봉합니다. 그렇지만 이때는 그의 아내인 벨라리아 (헤르미오네)가 죽었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였습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처음에 왕비가 마치 사망한 것처럼 꾸며놓고, 마지막 결말부분에서 헤르미오네를 “부활”시켰습니다. 이로써 그는 관객을 놀랍게 만들고 두 남녀의 결혼을 더욱 찬란하게 형상화시켰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헤르미오네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왔고, 레온테스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말하자면 딸의 행복한 결혼이라는 공통적인 구원을 얻게 누리게 된다는 점 말입니다.

 

 

「겨울 이야기」는 17 세기 전반부에 왕궁에서 자주 공연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영국의 귀족과 왕들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음을 말해줍니다. 이 작품은 그 후에 오랫동안 망각되었다가, 축약된 수정판으로 18세기 후반부에 다시 극장의 레퍼토리로 활용되었습니다. 수많은 극작가들이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을 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이를테면 데이비드 개릭 (David Garrick)의 「플로리첼과 페르디타. 하나의 극적인 전원시 Florizel and Perdita. A Dramatic Pastoral」(1756)가 가장 유명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아내에 대한 레온테스의 질투심이 생략되고, 젊은이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이 부각되어 있지요.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의 완결판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금 드물게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작품은 서서히 세인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낭만 극의 기이한 구조는 하나의 결함이 아니라, 보다 심층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과거 사람들은 작품에 담긴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진행 과정을 예로 들면서, 이것이 셰익스피어 연극의 긴장감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의 비평가들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기의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낭만 극을 고유하고도 독자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