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서로박: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

필자 (匹子) 2021. 7. 3. 17:05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후속 주자인 현대 독일의 대표적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 (J. Habermas, 1929 - )의 "인식과 관심 (Erkenntnis und Interesse)" (1968)은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 본서는 60년대에 서구의 학계에서 제기된 “실증주의 논쟁”의 일환으로 집필되었다. 실증주의 논쟁은 1961년 튀빙겐에서 사회학 연구에 관한 모임에서 촉발되었다. 두 연사인 카를 포퍼 (Karl Popper) 그리고 테오도르 아도르노 (Th. Adorno)는 실증주의에 관해 열심히 토론을 벌렸던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토론의 분위기에 자극을 받아, 인식과 이해에 관해 심도 있게 숙고하게 되었으며, 1965년부터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강연하게 되었다. 하버마스가 가장 중시했던 물음은 흄 (Hume)의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어떤 판단을 위한 객관적 유효성은 어느 범위에서 가능한가? 올바른 판단의 객관적 타당성에 관한 인간의 요구는 학문의 영역에 있어서 그리고 일상에서 어떻게 파기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하버마스는 후설의 철학을 예로 들고 있다. “후설의 예로서 우리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 발언을 순수하게 관련시키는 견해를 객관주의적이라고 명명합니다. 그것은 이론적 발언을 통해 표현되는, 그 자체 존재하는 무엇으로서의 여러 가지 경험적인 규모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객관주의적 발언이란 초월적인 틀 내지 카테고리를 없애버립니다. 비록 발언의 의미 내지 가치 판단 등이 그러한 틀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객관주의의 발언이 미리 설정된 관련 시스템 속에서 상대적으로 이해되면, 즉시 객관주의의 상은 파괴되고, 이로써 어떤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에 대한 시각은 사라지게 됩니다.”

 

여기서 하버마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객관적 인식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문화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화했다. 그럼에도 인간은 모든 것을 미리 판단하여, 자신의 입장을 인식 과정 속에 편입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다음의 사항에 유혹 당하고 있다. 즉 그 자체 존재하는 인식 장치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견해 내지는 선입견을 파기하려고 하는 성향이 바로 그러한 사항이다.

 

객관주의에 대한 믿음은 20세기에 이르러 시대와 무관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객관주의에 대한 맹신에 대항하며, 다음의 사항을 강조한다. 즉 모든 연구의 과정은 (삶의 과정 속에서 비롯한)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에 따라서 자신의 객체 영역을 구성한다. 그래,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사는 삶의 세계에서 파생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하버마스는 니체 Nietzsche의 시각에서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인식과 관심』이 간행되던 그 해에 하버마스는 니체의 인식 이론에 관한 문헌을 간행하였다. 발문에서 그는 니체의 확신에 동조한다. 즉 니체에 의하면 어떤 관심으로 귀결되지 않는 인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실제 삶으로부터 일탈된 (...) 순수한 이론은 가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인식의 행위는 실제 삶, 무언가의 필요성에서 나온 언어와 행위 속에서 구성되는 의미 관련성에 의해서 진척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인식론적 비판을 위해 철학사에서 많은 증인들을 불러내고 있다.

 

하버마스는 개별적 인식에 대한 관심을 우선 두 가지 기본적 특성으로 축소화시키고 있다. 기술적 인식의 관심사는 경험 분석에 근거한 과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에 비하면 어떤 사회학적 실천의 관심사는 역사적 해석학적 분석에 토대를 두고 있다. 두 가지 종류의 학문은 자연 내지 인간과의 규칙적인 조우를 통하여 어떤 방해 요소를 불러일으킨다. 두 개의 연구 과정은 제반 하자가 극복된 관계 유형을 다시 축조하는 일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관심사는 연구자의 시각적 방향을 규정한다. 다시 말해 현실은 이러한 시각의 방향에 따라 학문적 객관성을 얻게 되고, 인간 경험 속으로 근접된다.

 

여기서 실증주의 철학 (가령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퍼스, 메드 등)은 분명히 하버마스의 이론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실증주의 철학자들은 상기한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세계를 접하고, 세계 속에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점을 발견하는 인간은 어떤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다. 아무런 문제점을 의식하지 않고 우리가 세계를 대하면,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힐 계기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문고리를 돌릴 때, 문은 비로소 열리고,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안을 들여다보려는 계기를 얻게 되리라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모든 연구 과정은 일상성에서 나타난다.

 

"인식과 관심"에서 하버마스는 두 가지 과업을 설정한다. 첫째로 인식의 관심이 자유롭게 설정되고 겉보기에 객관적인 인식은 파기되어야 한다. 둘째로 인식의 관심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비판 이론과 연계된, 새롭게 증명되어야 하는 비판적 학문과의 관련 하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어떤 비판 학문의 관심사는 해방에 대한 관심사라고 한다. 하버마스는 이성을 동원한 비판적 성찰을 강조한다. 이러한 성찰은 그 자체 해방의 에너지라고 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유형의 비판 이론의 모델로서 정신분석학을 예로 들고 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 속에는 연구 행위와. 자기 성찰이 병행하여 진척되기 때문이다. 물론 비판적 성찰의 이성적 요소는 여전히 밖으로 확장되고 명확히 될 수 있는 이성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하버마스가 파악한 이성 개념은 다른 무엇이 설정됨으로써 그것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삶의 세계에서 재구성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재구성의 작업은 "인식과 관심"이 발표된 13년 이후에 "소통 행위의 이론"에서 결실을 맺는다. 물론 하버마스는 13년 동안 언어의 소통 이론이라는 미시적 연구에 집중한 것은 사실이다. 이 연구에서는 삶의 재구성으로 발견된 이성의 개념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성의 개념은 어떤 비판적 사회 이론의 규범적 토대 하에서 형성된 것인데, 하버마스는 바로 이러한 규범적 토대를 본서에서 찾고 있다.

 

"인식과 관심"에서 하버마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세밀하게 비판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모델은 나중에 발전되는 담론 이론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 스스로 브로이어 (Breuer)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자신의 고유한 연구 방식을 착안할 수 있었다. 브로이어의 여 환자들이 병이 재발한 이유는 그들이 다만 최면 속으로 침잠했을 뿐, 자기 성찰의 과정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면을 통한 무의식의 해방은 기억의 장애물을 완전히 뛰어넘지 못한다. 왜냐하면 최면이 주체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는 게 아니라, 의식의 진행 과정을 그저 조종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잘 인식했으며, 성찰 내지 자기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정신 분석의 카테고리들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는 환자와 의사의 대화를 중시했다. 그럼에도 프로이트는 자신의 초기 이론과는 약간 어긋나게 이러한 카테고리들을 그저 객관화시켰을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하버마스의 비판은 정신 분석 내부에서 뜻 내지 의미에 관한 자기 비판적 토론으로 확장되고 있다. 하버마스는 “자기 성찰의 틀 속에서의 이론의 형성 작업”이라는 프로이트의 모델 속에서 자신의 담론 이론을 발전시켰다. 예컨대 토론의 참여자는 담론을 통해서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경험의 토대 하에서 어떤 공통되는 견해를 찾아낸다. [이는 정신분석학에서는 가설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담론 속에서 발견되는 공통의 견해는 (혹은 정신 분석학에서의 가설은) 스스로 검증되기 위해서 반드시 경험으로 주어진 현실과 부딪쳐야 한다. 경험들은 가급적이면 담론 토대의 가능한 교환 내지 교체 등을 통해서 자기 성찰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이는 예컨대 담론의 참여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가능하다. 내가 어떻게 이러한 발언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내가 사용하는 개념은 어떠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가? 내가 지금까지의 삶에서 어떻게 이러한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들을 생각해 보라.

 

프로이트의 모델은 하버마스의 사회 이론의 카테고리를 발견하는 데 거의 이정표와 같이 작용한다. 다른 이론가들을 비판적으로 거론하며, 사회 현실에 대한 그들의 발전된 이론들을 비판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삶의 세계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의사소통의 시스템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성의 개념을 예리하게 발견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에게서 프로이트와 유사한 객관주의의 경향을 고찰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객관주의의 경향은 프로이트의 경우와는 다른 근원을 지닌다.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기술과 학문」이라는 논문에서 조심스럽게 언급되는데, 본서에서 자세히 거론되고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인간 사회 그리고 자연이라는, 이른바 가능한 인식의 서로 다른 두 영역을 무엇보다도 노동 개념의 도움으로 종합하였다고 한다. 이때 마르크스는 특히 자연과학의 연구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인식을 오로지 인간의 생산 행위로 축소화시킴으로써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기능을 도외시했다는 것이다. 즉 “인식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주체의 능력에 관한 가능한 제반 조건들에 대한 성찰”이 바로 그 기능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바로 이 때문에 자연에 대한 도구적 행위 그리고 사회 내의 의사소통 등은 서로 구분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 자연에 대한 도구적 행위 그리고 사회 내의 의사소통의 행위는 어떻게 서로 구분될 수 있을까? 우리는 두 개의 다른 영역을, 한마디로 가능한 인식에 대한, 결코 완전하지 않은 보충적인 요소로 구분해야 한다. 하버마스는 두 개의 인식론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야말로 학문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어판으로는 강영계 교수의 인식과 관심 번역본이 있는데, 무척 읽기가 불편하다. 번역서는 일단 가독성을 지녀야 하는데, 안타깝다. 더 나은 번역서가 간행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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