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오디오세대, 백판 세대

필자 (匹子) 2022. 6. 23. 07:26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비디오 세대”라면, 73 학번인 나는 “오디오 세대”에 속합니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다행히 독재 체제가 어떤지를 잘 모르며, 그래도 옛날보다는 약간 편안한 (?) 입시 지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힙합”들의 복합 매체에 대한 관심은 어떤 새로움에 대한 욕구이지, 어떤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출현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당시의 젊은이들은 끔찍한 현실로부터 탈출하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부산에서 삭막하고 고통스러운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음악에서 어떤 도피처를 발견했는지 모릅니다.

 

바흐 Bach에서 비틀즈까지, 김민기에서 C.C.R.을 거쳐, 제스로 틀 Jethro Tull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장르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200원만 내면, “음악실”에 죽치며 음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커피숍마다 DJ (김대중 대통령이 아님ㅋㅋ)가 뮤직 박스에 앉아서, 신청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DJ로 일하던 형의 친구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었습니다. 그는 나와 함께 음악 퀴즈 경연 대회에 참가하여 작은 상도 많이 타곤 하였습니다.

 

캠퍼스에는 항상 “해골바가지”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몇몇 친구들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없었습니다. 주위의 고시 공부하는 친구들을 제외하면, 대학 주위에서 빈대떡을 안주로 삼아 막걸리를 마시거나, 당구를 치며 그냥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의협심 없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주위의 더러운 꼴을 보면, 술 마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 같은 장발족은 걸핏하면 백주 대낮에 허리를 채여 질질 끌리다가 닭장차에 실려 갔습니다. 머리깎이고 하루 밤 구류 살다 나오면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 같아 보였습니다.

 

가끔 서울의 여학생들은 부산의 남학생들에게 면도날을 우편으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생면부지의 남학생들에게 왜 면도날을 보냈을까요? 면도날을 받은 학생은 수십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南男들의 불결한 수염을 北女들이 질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데모하지 않는 부산의 겁쟁이들이여, 스스로 고환이나 잘라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로 판명된 바 없습니다. 어쨌든 그 때문이었을까요? 나중에 부마항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박정희의 18년 독재 정치는 종말을 고합니다.

 

1970년대에는 캠퍼스 커플은 명칭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캠퍼스 연인campus lovers”이 옳은 표현이 아닐까요? 어쨌든 학생들은 경직된 사회 분위기에 걸맞게, 연애에 적극적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진득한 사랑을 즐기는 대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나 역시 이 분야에 행운아는 못되었습니다. 순진한 젊은이가 “데이트 신청의 묘미는 거절당하는 데 있다”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알았을 리 만무했습니다.

 

게다가 사랑의 도끼로 아름다운 나무를 열 번 찍을 만큼 나는 한가롭지도, 낯 두껍지도 않았습니다. 이때 나를 달래준 것은 -詩 쓰기 외에- 음악이었습니다. 당시에는 CD도 없었고, 라이선스 LP도 드물었으며,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곤 라이선스 음반의 주형으로 찍어내는 싸구려 백판이었습니다. 다행히 백판의 종류는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어느 분이 당시에 그렇게 많은 백판을 만들어 팔았는지, 궁금합니다.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작품들을 엄청나게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백판 구입 그리고 문학 잡지의 구입은 매달 치러야 하는 홍역과 같았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당시에는 왠지 권위를 강요하는 것 같아 싫었고, 록 음악에는 저항이 담겨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 무디 블루스 Moody Blues의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저스틴 헤이워드의 기타 그리고 마이크 핀더의 오르간 연주에 감동하곤 하였습니다. 롤링 스톤즈의 “시스터 모르핀Sister Morphine”,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Shine on you crazy Diamond” 등을 들으면, 지금도 당시의 내 젊은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중고 전축에다 백판을 한 장 얹으면, 살벌하고 삭막했던 세상이 순간적으로 찬란한 오아시스로 변하는 게 아닌가요?

 

그래, 1970년대 세대는 신기루를 찾아 정처 없이 헤매는 낙타의 운명을 안고 사막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 나는 한 마리 낙타였습니다. 갑갑한 사막에서 타는 목마름을 참고 살아가는 동물이었지요. 언젠가 황지우 시인은 “구 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라는 시집을 간행한 바 있습니다. 나 역시 부산의 남포동 골목을 터벅터벅 걸어가며, 찬란한 신기루 속에 사로잡혀 있던 낙타 한 마리였습니다. 참담한 현실에서 떠올린 찬란한 신기루의 세상, 그것은 오로지 음악을 통해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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