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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1)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

필자 (匹子) 2023. 5. 4. 19:57

「당통의 죽음」은 게오르크 뷔히너 (1813 - 1837)의 4막으로 이루어진 극작품 (1835년 발표)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902년에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기센의 의학생이었던 뷔히너는 1834년 초에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공부하였다. 그는 특히 자유주의적 프랑스 역사가인 L. A. 티르스 (Thiers)의 "프랑스 혁명의 역사 (Histoire de la Révolution Françqise)?"를 읽었다. 티르스는 앙시엥 레짐의 몰락 그리고 나폴레옹 시대까지의 투쟁을 “관료주의와 시민 사이의 싸움”으로 평하고 있다. 티르스는 F. A. M. 미네 (Minet)와 함께 역사 서술의 숙명론을 주창한 바 있다. 1834년 10월부터 1835년 1월 사이에 다름슈타트 대공작 도서관에서 특히 메르시에 (Mercier)의 ?새로운 파리 (Le nouveau Paris)? (1799)를 빌려보았다.

 

뷔히너는 스스로 말하기를 5주만에 이 작품을 집필하여, 1835년 2월 21일에 프랑크푸르트의 편집자, 자우어렌더 (Sauerländer)에게 보냈다. 당시 편집인은 칼 구츠코 (K. Gutzkow)였는데, 약간의 가필을 거쳐 잡지 “푀닉스”에 실었다. 구츠코는 작품 분량을 약간 줄였으며, 특히 성 (性)을 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을 마음대로 삭제한 뒤 잡지에 싣게 했던 것이다. 1837년에 구츠코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작품 속에는 어떤 거친 혁명가 나부랭이들의 짓거리가 극에 달하고 있다. 인권의 선언은 간간이 벌거벗은 육체로 그리고 장미로 치장된 채 변모해 있다.” 1835년 7월 뷔히너는 “헤센 급사”라는 정치적 선언문 때문에 헤센을 떠나 도망쳐야 했고, 원고료를 여비로 사용했다.

 

?당통의 죽음?은 4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794년 4월 5일 처형된 당통의 4주에 걸친 파리에서의 삶에 관해 다루고 있다. 맨 처음, 그러니까 1792년경에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왕당파 그리고 승려들의 세력을 무찌르려고 했다. 그 와중에 혁명 세력은 당통의 온건파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르의 급진파로 나뉘어진다. 이야기는 온건파가 급진파에 의해 패배하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실제로 뷔히너는 사건의 연대기를 충실히 고수하지는 않는다. 이는 역사적 상황의 겉면 그리고 내적인 경향성을 아주 명확하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첫 번째 막에서 로베스피에르는 굶주리는 인민에 대해 “적에 대한 피의 심판”을 개최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는 또한 술집에서 공포 정치가 “공화국의 무기”라고 공언한다. 이를 간접적으로 듣게 된 당통은 다음날 로베스피에르를 찾아간다. 두 사람 사이에 격론이 벌어진다. 당통이 테러를 종식시키자고 주장하는 반면에,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이 끝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로베스피에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 혁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혁명을 절반 정도 완성한 자는 자신 스스로를 무덤 속에 가둘 수밖에 없네.” 결국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르는 당통을 체포하자고 몰래 협의한다.

 

제 2막의 장면은 다음 날을 보여준다. 혁명 세력들은 당통을 추방하려고 한다는 소문은 이미 클럽에 이르러 있다. 당통의 친구들은 클럽으로부터 빠져나가 도망치라고 당통에게 말한다. 그러나 당통은 이러한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내가 고함을 질러야 하는가?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삶이란 그것을 보존하려고 발버둥칠 애쓸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이미 제 3장면에서 군인들이 당통의 집 앞까지 돌진해 있다. 생 쥐르는 당통의 체포를 다음과 같이 정당화하고 있다. 즉 혁명은 “인류를 젊게 하기 위하여, 인류를 갈기갈기 찢고 있다”는 것이다.

 

제 3막에서 줄거리는 시간적으로 약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통 추종주의자들은 감옥으로 송치된다. 재판이 거행되고, 당통은 심문 당한다. (이는 실제로 수일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작품에서는 신속한 장면 전환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혁명 재판은 가급적이면 신뢰할만한 배심원들을 임명한다. 당통은 청중들과 배심원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나, 청중들은 어느새 그에 대해 반기를 든다. 실제로 극작품 내에서 혁명 재판정은 피고에게 어떠한 변론도 허용하지 않는다.

 

제 4막에서 당통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최종 판결을 당한다. 그들은 사형 집행을 기다린다. 당통의 아내, 쥴리는 자살한다 (이는 역사적 사건과는 다르다). 데물렝의 부인, 루실 역시 남편과 그의 친구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진 다음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루실은 정치적 사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녀는 처형이 끝난 다음에 모든 것이 이전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황제 폐하 만세!” 하고 외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극작가 뷔히너는 사건의 진행 과정을 면밀히 추적하려는 의도를 지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권모술수를 묘사하는 일이었다. 뷔히너는 놀랍게도 프랑스 혁명가 지니고 있는 초월적 질서의 시스템을 예리하게 표현하였다. 다시 말해서 어떤 초월적 질서의 시스템이 현상과 우연 그리고 임의로운 세계의 배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간접적 지적으로 통해서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문학의 주제를 뛰어넘고 있다. 뷔히너는 32개의 장면을 통해서, 인습적이고도 감정 그리고 긴장을 의도하는 사건 전개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초월적 질서의 시스템은 다음의 사항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즉 사람들은 당통주의자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그토록 술수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러한 술수는 행동으로 이전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어떤 현실적 상황이 결국 주인공 당통을 필연적으로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혁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혁명이 우리를 행동하게 했을 뿐이지요.” 한마디로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당통의 의지 뿐 아니라, 로베스피에르의 의지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결국 한 사람을 피해자로, 다른 한 사람을 가해자로 “활용”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 말로 작품 ?당통의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