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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2)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

필자 (匹子) 2023. 5. 5. 15:24

(앞에서 계속됩니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실제로 고통당하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행위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당통은 인간 삶을 즐기고, 향락을 추구한다. 이에 반해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생 쥐르는 급진적으로 미덕을 수호하려고 한다. 문제는 이들 두 그룹 사이에 굶주리는 인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뷔히너는 편집자 구츠코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혁명이 성공을 거두려면, 배운 계급 뿐 아니라, 배우지 못한 가난한 계급 역시 혁명의 자양을 뜯어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 프랑스 혁명은 이 점을 전혀 건드리지 못했다.

 

혁명은 사회 현실의 궁극적 변화를 이끌지 않고, 스스로를 소모시키고 있다. 물론 상류층을 이루는 계급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는 다만 생각으로 머물 뿐이다. 그렇기에 혁명은 주어진 구체적 현실 상황을 변모시키기에는 역부족일 뿐이다. 과격파 사람들은 단두대 처형이 너무 느릿느릿하게 진행된다고 호소한다. 그리하여 로베스피에르는 다만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러한 요구 내지는 호소를 역이용한다.

 

결국 당통 파는 처형되지만, 이로써 나타나는 것은 인민 그리고 과격 지도자 사이의 갈등 내지는 의견 대립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혁명을 진척시키기 위해서 반대파를 처형했지만, 결국 그들이 행한 것은 혁명의 진척이 아니라, 반대파의 숙청에 불과하다. 바로 이 점은 -하이네와 뵈르네가 서로 입장 차이를 보인 바 있듯이- 당시의 정치적 철학적 과제였다. 이러한 모순 사항은 바로 뷔히너의 작품에 의해서 생생하게 다루어졌던 것이다.

 

이를 다시 설명해 보기로 하자. 뷔히너는 자코뱅주의자의 관념론에 대해 당통주의자의 유물론을 대립시키고 있다. 관념론도 유물론도 혁명적 목표를 위한 실질적 전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셈이다. 극작가는 당통주의자의 태도를 감각적 해방의 순간으로 강조하고 있다. 당통주의자들은 특권층의 사람들로서 인민에게 행복 추구의 날이 멀지 않았다고 호언장담하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만 이러한 행복을 미리 떠올리면서 우선권을 즐기고 있다. 그러한 한 그들은 자신의 프로그램을 보장해줄 수 있는 요구 사항을 배반하고 만다.

 

뷔히너가 무대 위에서 보여주고 있는 현실은 고전적 조화로서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충실하게 근본적 자료를 원용하고, 정치적 테제를 고려하지만, 제반 문체 및 양식을 고려할 때 등장인물들은 이질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당통이라는 인물은 더욱 그러한 이질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향락주의는 세상에 대한 구역질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당통은 항상 반복되는 자기 보존의 강요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래, 진실로 나에게는 모든 게 지루하기만 했어. 항상 동일한 옷을 걸치고, 항상 동일하게 주름을 지어야 하는 일...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야.”

 

행동하는 사람들이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으면, 그럴수록 혁명가들은 역사적 진행으로부터 조금도 은혜를 입지 못하고, 창조주로부터 추호의 동정심을 얻지 못한다. 그렇기에 로베스피에르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혹시 우리는 몽유병자가 아닐까?” 당통은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간음하고, 기만하며, 도둑질하고 살인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폭력에 의해서 우리는 마치 철사풀린 인형과 같아.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야.” 이렇듯 당통은 자신의 행위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눈 먼 세계는 인간의 고뇌에 대해서 어떠한 위안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당통의 부하들은 갇힌 채 죽음을 기다린다. 그들은 죽음 그리고 신에 관한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이러한 대화는 포이어바흐가 1830년 익명으로 발표한 「죽음 그리고 불멸에 관한 어느 사상가의 사고 (Gedanken eines Denkers über Tod und Unsterblichkeit)」를 연상시킨다. 카미유는 유물론적인 세계상의 윤곽을 묘사한다. “우리는 악한이자 천사야. 멍청함 그리고 재능을 한꺼번에 지니고 있지. 잠자고, 밥 먹은 뒤 소화시키며, 아이들을 생산하지. 모두가 이러한 짓을 행해. 그 밖의 다른 일들은 동일한 주제에 대한, 다른 음색으로 변조된 것들에 불과해.”

 

작품은 유토피아의 설계와는 거리가 멀다. 자연은 드물게 나타나고, 아름다움에 관한 경험은 죽음에 대한 예견과 결부되어 있다. 성적 묘사는 첫 장면부터 나타난다. 성 매매는 목숨을 부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혁명을 주도하는 자는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창녀들을 찾는다. 그러나 파리장의 한 명인 마리온 (Marion)에게 섹스란 삶의 유토피아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미는 자아도 재화도 없는, 몸 파는 여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하나일 뿐이에요. 하나의 끝없는 동경과 포착, 하나의 화염, 하나의 강물이에요. 나의 어머니는 거대한 절망으로 죽었고, 사람들은 나를 손가락질하지요. 그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오로지 하나로 귀결되거든요. 그것은 육체들, 그리스도의 상, 꽃 그리고 어린이 장난감 등을 생각해 보세요. 그건 사람들이 가장 즐겨 기도하고 가장 즐기는 일이거든요.”

 

「당통의 죽음」은 맨 처음 그렇게 호평을 받지 못했다. 1840년 문학사가 요젭 케라인 (J. Kehrein)은 그것을 “거친 공포 정치의 시대에 나타난 끔찍한 그러나 진정한 상”이라고, 비토어 (K. Vietor)는 “영웅적 페시미즘의 허무주의적 비극”이라고 평했다. 마르텐스 (W. Martens)는 내심 종교적 초월을 담고 있는 극작품으로, 피코크 (Peacock)은 정치적 체념을 담은 작품이라고 논평했다. 연구가들은 어리석게도 극작가 뷔히너를 당통으로, 혹은 로베스피에르로 동일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가령 게오르크 루카치 (G. Lukacs)는 뷔히너의 정치적 이상을 자코뱅주의자의 측면에서 구현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인민에 대한 극작가의 관심을 빠뜨릴 수 없다. 인민이 목적 없이, 느릿느릿하게 행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뷔히너는 인민에 대해 깊은 동정심과 애정을 표명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