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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1) 뷔히너의 헤센 급사

필자 (匹子) 2023. 1. 7. 11:52

(1) 혁명적 선전물로서의 헤센 급사: 친애하는 D, “헤센 급사”는 게오르크 뷔히너 (1813 - 1837)에 의해 씌어지고, 나중에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바이디히 (1791 - 1837)에 의해 수정 가필된 사회 혁명적인 선언문입니다.  8 페이지에 달하는 이 글은 오펜바흐에서 총 1000 편으로 인쇄되었는데, 익명의 저자가 “1834년 다름슈타트”에서 간행하였다고 씌어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연대기의 측면에서 그리고 주제상의 측면에서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그리고 독일의 자코뱅주의자 칼 클라우어 (K. Clauer) 혹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레브만 (G. Fr. Rebmann) 등의 정치적 선언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서 독일 삼월 전기 문학의 핵심적 출판물에 해당합니다.

 

(2) 뷔히너에게 영향을 끼친 문헌들: 뷔히너와 바이디히는 제각기 다른 세계관을 지녔지만, 혁명의 영향을 공통적으로 받았습니다. 뷔히너는 1831년에서 1833년 사이에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부한 바 있으며, 프랑스 전제 군주의 치하에서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의 새로운 계급적 대립을 익히 체험한 바 있었습니다. 가령 리옹에서는 1831년 비단 짜는 노동자들이 직접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러한 폭동은 1834년에 재차 발생할 조짐을 보였습니다.

 

이때 뷔히너는 초기 공산주의의 진보적 입장을 지닌 자들로부터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귀스트 블랑키 (August Blanqui, 1805 - 1881)의 “인간과 시토이앙에 관한 권리의 사회 (Société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는 정치적 삐라로 널리 퍼져서 독일의 자코뱅주의자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블랑키의 이 문헌은 라 보에시 (1530 - 1563)의 “자발적 복종 (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3) 바이디히는 누구인가?: 바이디히는 기센 근처의 부츠바흐에 사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자, 그곳 라틴어학교의 교장이었습니다. 그는 1814년부터 헤센 지역에서 야권 세력에 가담해 있었는데, 민족 줌심의 낭만적이고 민중 운동에 가담해 있었습니다. 그는 기센의 급진주의자 칼 폴렌 (Karl Follen, 1796 - 1840)과 함께 힘을 결집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혁명 운동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헤센 다름슈타트 지역에서 혁명적 종말론의 운동이 서서히 나타난 것도 바이디히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혁명적 종말론이란 -성서의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파국처럼- “미래의 어떤 시기가 도래하면 모든 인간들은 신의 심판을 받는다.”는 이른바 기독교적 신앙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4) 선전물이 집필된 이유와 계기: “헤센 급사”가 씌어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 내지 전제 조건들이 있습니다. 뷔히너는 1833년 10월에 의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으로 기센에 도착합니다. 그곳에는 혁명적 지조를 지닌 뷔히너의 친구들이 동아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1834년 초에 뷔히너는 바이디히를 알게 됩니다. 바이디히는 몇몇 다른 세력과 결탁하여 오버 헤센 지방의 지방 국회를 무장으로 점거하여, 전 독일에 폭동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당국의 중재에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 바이디히는 무엇보다도 일반 인민들을 깨우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인민들은 현재 어떠한 비참한 상황 속에 살고 있으며, 어떤 다른 삶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5) 뷔히너와 주위의 정황들: 친애하는 D, 뷔히너는 비록 악관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주어진 현실적 상황을 예리하고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1834년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려던 사람들이 출감합니다. 이들은 정치적 경험을 지닌 대학생들 그리고 수공업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즉시 혁명 분과 위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이때 뷔히너는 무엇보다도 낮은 계층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치게 하려면, 정치적 선전문을 퍼뜨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그들을 설득합니다. 뷔히너는 앞에서 인용한 “인간과 시토이앙에 관한 권리의 사회”를 모범으로 삼고, 출감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인권 사회의 모임을 결성합니다. 사람들은 여기 모여 평등에 바탕을 둔 초기 공산주의의 사회 이론에 관해서 토론을 벌립니다.

 

(6) 뷔히너와 바이디히, 그들의 입장 차이: 3월에 뷔히너는 헤센에 살고 있는 소작농부들과 수공업자들을 위해서 첫 번째로 선전문을 작성하여, 이를 혁명 분과 위원회에 제시합니다. 당시에 출판업자를 친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바이디히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뷔히너는 그와 여러 가지 문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에게서 헤센 지역을 통치하는 대공작의 여러 통계 자료를 빌렸습니다. 처음에 바이디히는 뷔히너의 글을 그대로 인쇄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뷔히너가 부자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자들을 무지막지하게 공격하면, 폭정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적 정책이 실패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바이디히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7) 바이디히의 원문 수정: 그렇지만 바이디히는 뷔히너의 글에 대해 상당히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뷔히너의 글을 수정하여 남부 독일의 공화주의자들에게 보냈습니다. 말하자면 바이디히는 남부의 동지들과 정신적으로 협력하고, 남부에서도 일반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서 뷔히너의 글을 발표하게 하도록 조처했던 것입니다. 뷔히너는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바이디히는 글을 약간 수정하여 남부 독일 여러 지역에 보냈습니다. 바이디히의 수정본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눈에 띕니다.  “부자에 대한 공격”은 “고상한 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수정되었고, 자유주의 정당을 비난하는 몇몇 구절은 삭제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성서의 구절들이 첨가되었습니다. 가령 두 번째 부분은 완전히 새롭게 씌어졌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