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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2) 뷔히너의 헤센 급사

필자 (匹子) 2023. 1. 7. 11:54

(앞에서 계속됩니다.)

 

(8) 헤센 급사의 내용 1, 부르주아 비판: 친애하는 D, 뷔히너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헤센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제적 궁핍함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뷔히너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국가의 고통을 모조리 지고 있는 반면에, 고상한 자들은 이를 이용해먹고 있다고 말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법들은 귀족들, 부자들 그리고 국가의 관리들의 수중에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일반 사람들로부터 혈세를 짜낸다는 것입니다. 뷔히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법을 소유하고 있는 계급은 사실상 사회에 중요하지 않는 부유한자들 그리고 학자들이다. 이들은 온갖 노력을 다하여 지배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 정의는 다만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너희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데 사용될 뿐이다.”

 

(9) 헤센 급사의 내용 2, 국가 권력 비판: 뷔히너에 의하면 수많은 상급 하급 관리들이 월급 받기 위하여 농부들은 이빨을 갈면서 경작지에서 곡식을 수확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위해서 세금을 바치고 있는데, 정작 군복을 입고, 등 뒤의 북소리에 맞추어 총을 쏘다가 전사하는 자들은 인민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인민의 아들들은 폭군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궁전을 사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농부, 수공업자, 단순 노동자의 아들들은 “합법적인 살인자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법적으로 강도질 노략질을 일삼는 권력자를 보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국가 내지 국가의 기관들은 “신의 은총을 지닌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지탱하는 기계”로서, 인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합니다. 농부와 시민들은 국가에 의해서 밭을 가는 짐승이며, 쟁기를 끄는 소로 전락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굶주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혹사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0) 헤센 급사의 내용 3, 부유한 귀족 비판: 뷔히너는 부자와 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름진 얼굴을 지니며, 그들의 고유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인민의 딸들은 그들의 하녀 내지는 창녀로 살아가고, 인민의 아들들은 그들을 모시는 종이며, 군인이다. 다름슈타트로 가서, 주인들이 너희들의 돈으로 어떻게 즐기는지를 바라보라. 제발 너희의 굶주리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너희가 애써 만든 빵이 다른 배에 가득 채워진다는 사실을. 너희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그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너희가 땀 흘리면서 짜낸 것이라고. 화려한 옷끈은 너희가 손에 못이 배이도록 힘들게 기운 것들이라고.” 물론 이러한 사회 혁명적 발언은 그 자체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아가 “헤센 급사”에는 프랑스 혁명에서 유래한 “오두막에 평화를, 왕궁에 전쟁을!”이라는 유명한 슬로건은 그 자체 시대를 넘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11) 뷔히너의 노여움: 친애하는 D, 그렇지만 뷔히너는 자신이 집필한 텍스트가 바이디히에 의해서 상당부분 수정된 데 대해 몹시 분개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라든가 그 밖의 중요하면서도 핵심적 사항들이 바이디히에 의해 마구잡이로 삭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뷔히너는 “헤센 급사”를 더 이상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12) 수정본에서 나타난 뷔히너와 바이디히의 입장 차이: 우리는 바이디히가 수정한 대목에서 어떤 특징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비참상 내지 어떤 특정한 인간군을 비판하고, 나아가 어떤 혁명 신학적 이유를 첨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뷔히너가 국가가 저지르는 죄악, 예컨대 조세라는 미명으로 매일 거두어들이는 “절도행각”에 관해서 언급하려 하였습니다. 나아가 국가의 관리는 뷔히너에 의하면 국가 기관에 종속된 기계에 불과한 존재였습니다. 이에 반해서 바이디히는 조세를 거론하면서도, 일부 몰지각한 인간들, 가령 “거짓되고, 비굴하며 배반을 일삼는” 특정한 인간에 국한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려고 했습니다.

 

뷔히너는 인민의 저항을 합법적인 것으로 용인하고, 1만 명의 억압자와 70만 명의 생산자 사이의 관계를 피력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바이디히는 저항 운동을 어떤 세 단계로 진행되는 역사 신학적 행위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바이디히의 견해에 의하면 자유로운 선조들이 살던 찬란한 조화로운 나라라는 첫 번째 상태는 현재의 비참한 상태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신이 부여한 자유와 평등의 삶은 사악한 제후들의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부자유와 억압이 횡행하는 삶으로 돌변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비참한 상태는 주의 권능으로 제 3의 바람직한 상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바이디히의 생각이었습니다.

 

(13) 나오는 말: 한마디로 결국 “헤센 급사”에 원래 기술된 사상은 바이디히에 의해서 약간 다른 사상으로 전환됩니다. 다시 말해서 뷔히너의 사회 혁명적 입장은 바이디히에 의해서 혁명 신학적 차원으로 바뀌게 되고, 뷔히너가 의도한 초기 공산주의의 관점에서 개진한 부르주아 비판은 바이디히에 의해서 낭만적 반공주의로 이전되어버립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헤센 급사”는 당 시대에 커다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속적으로 간행될 수 없을 정도로 당국의 억압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선전물 속에 담긴 혁명적 정신과 뷔히너의 선견지명으로 인하여 자신의 무릎을 치면서 감탄했다고 합니다.

 

뷔히너는 1834년 9월 기센을 떠나 다름슈타트로 행합니다. 그곳에서 어떤 단체를 구성하여, 어떤 다른 사람의 중재를 받지 않은 채 선전문을 간행하려고 일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당국은 뷔히너라는 인물을 서서히 파악하고 체포하려고 합니다. 위험을 느낀 뷔히너는 결국 1835년 3월에 스트라스부르로 도주합니다. 바이디히는 1835년 4월에 체포됩니다. 그는 1837년 뷔히너가 병으로 사망한지 나흘 후인 2월 23일에 감옥에서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