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일)동화

블로흐: 동경의 존재인 미뇽

필자 (匹子) 2022. 4. 27. 11:25

 

 

빌헬름은 미뇽의 연인이 아니다. 또한 그는 미뇽의 보호자도, 아버지도 아니다. 미뇽은 빌헬름에게서 처음으로 인간적 따뜻함을 느낀다. 빌헬름은 그미에게는 고향으로서의 인간이다. 다른 한편 빌헬름은 단 한 번도 인간적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 그의 뇌리에 언제나 떠오르는 것은 이탈리아의 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은 실재하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저 멀리 도사린 “확고한 집”에 관한 상일뿐이다.

 

미뇽은 빌헬름 마이스터 외에도 펠릭스 그리고 하프너라는 사람과 조우한다. 이들과의 관계 역시 빌헬름과의 기이한 관계가 그러하듯이, 흐릿할 뿐이다. 처음에 미뇽은 어른들이 우글거리는 집단 속에서 외로운 아이로 살아간다. 그때 그미는 펠릭스에게 심정적으로 이끌린다. 펠릭스 역시 그미와 마찬가지로 나이 어리다. 순진한 아이가 다른 순진한 아이에게 매료된 셈이다. 고독의 아픔을 느끼는 아이가 다른 고독한 운명을 드러내는 아이에 이끌렸다고 할까? 음악을 사랑하는 그미는 꼬마 음악가에게 묘한 감흥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러한 관계 속에는 모성이라든가 여성성과 같은 요소가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 미뇽은 성 (性)과 무관하게 머물러 있다. 그미는 그야말로 공중에 떠있는 동경의 주체일 뿐이다. 그미가 성적인 문제로 외부 환경과 투쟁한 적도 있는데, 이는 다만 자신이 사내아이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미뇽이 자웅 동체의 요소 내지는 이중적 성 (性)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동경이 결코 어떤 성적인 색깔을 지니지 않으며, 또한 이에 국한될 수 없다는 점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미뇽의 마지막 노래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그리고 저 천국의 형체들/ 그것들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묻지 않는다. (...)

 

미뇽의 동경은 에로틱으로 시작해서 에로틱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미의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부유 (浮遊)한다는 점에서 투명한 특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에로티시즘 역시 그미의 동경 속에 투영될 수 있고, 소유와 무소유의 지속적인 무한성 역시 얼마든지 첨가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거리감으로부터 벗어나서 도달될 수 없으며, 동경의 정서 역시 지상에 착륙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하나의 상으로 남아 있을 뿐, 그 자체 존재로 향하는 변화일 수 없다.

 

예컨대 미뇽이 죽기 직전에 의사는 그미를 진단한 뒤 빌헬름에게 말한다. “선한 아이는 참으로 기이한 존재이군. (...) 아이의 몸 자체가 오로지 깊은 동경만으로 똘똘 뭉쳐진 것 같아. 아이는 조국을 다시 바라보고 싶은 갈망을 지니고 있어. 그리고 자네에 대한 갈망 또한. 여보게 친구, 어쩌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 바로 이 두 가지만이 그미가 실제로 느끼는 지상의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자네 그리고 조국에 대한 갈망은 오로지 어떤 무한정한 먼 곳에서 성취될 것 같아. 그것들은 이러한 유일한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갈망들이야.”

 

미뇽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미는 마치 먼 곳으로 향해 떠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미의 이러한 동경은 전체적 인물 형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지 못하다. 어쩌면 우리는 미뇽에게서 악령과 같은 특성을 느낄 수 있다. 아직 발전되지 못한 미뇽의 자아 속에 신들린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맨 처음 알아차린 사람은 바로 나탈리였다.

 

그미는 미뇽의 병에 관한 일반적 사항을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는 내면의 몇 안 되는 깊은 감정에 의해서 서서히 소진되리라고 했다. 또한 아이는 스스로 감추고 있는 내적 자극에 의해서 빈약한 심장에 무리를 가할 정도의 경련을 일으키며, 때로는 생명에 위협을 가할 정도로 고통을 느끼리라고 했다. (...) 설령 경련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자연의 힘은 다시금 아이의 맥박을 뛰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지금까지 드물게 느끼던 것 이상의 거대한 량의 고통이 엄습하게 되는 데 대해 두려워하리라는 것이었다.” (...)

 

 

 

 

 

나중에 미뇽의 장례식 때에 사람들은 “기계 공 출신”의 삼촌을 통해서 미뇽이 어느 집안에서 유래했는지 알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미뇽의 가계 (家系)를 알아내지 못한다. 미뇽의 인물에 관한 구상은 결국 차단되고, 이야기는 다른 사람으로 이전된다. 미뇽은 더 이상 빌헬름 마이스터의 삶에 관여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미는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원형으로서의 미뇽은 계속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미는 청춘 시기에 우뚝 선, 부드럽고도 유토피아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

 

미뇽의 모든 특성이 하나의 형태 속에 폐쇄되지 않고 찬란한 음으로 퍼진다는 것은 과히 특징적이다. 그미는 다음과 같이 노래 부른다. 그미가 말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만약 그미가 말할 경우, 그미의 발언은 “거대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표현이 모든 것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내가 말하지 않게 하세요, 침묵을 지키게 하세요.” 무조건적인 동경은 마치 사랑이 우정을 갉아먹는 것과 같은 내적인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오로지 하나의 맹세가 내 입술을 누르고 있어요,/ 오로지 한 분의 신만이 내 입을 열게 하겠지요.”

 

세 편의 노래에서 미뇽은 에로스를 노래한다. 에로스는 미뇽이 끝내는 모든 일을 그제야 착수하고 있다. “동경이 무엇인지 아는 자만이/ 내가 무엇으로 고뇌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님을 따라 넓은 곳으로 확장되는 불붙은 상과 무관하지 않다. 동경하는 자는 자신의 상을 멀리 확장시키지만 결국에는 무기력하게 바로 여기 이곳에 추방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의 노래가 이어진다. 첫째 연에서 오로지 포에지, 그 자체 가르침인 아름다운 현상 등 모든 것은 감동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어두운 잎 속에서 황금빛 오렌지가 불타고,/ 부드러운 바람은 푸른 하늘에서 불어온다,/ 도금양 나무 조용히 월계수 높이 있고/ (...) 그리로! 그리로/ 오 나의 연인이여, 그대 따라 그곳으로 향하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