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블로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유토피아의 정신"은 20세기초의 유럽을 염두에 두면서, 시대 그리고 예술에 관한 명상을 반성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블로흐가 쓴 대부분의 글이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 짧은 단상으로 시작된다. 블로흐는 예컨대 항아리, 유리 그리고 가구 등과 같은 가시적이고 지엽적인 사물들을 다루면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해 나간다. 뒤이어 이어지는 논의는 예술에 대한 개념적인 해명이다.
블로흐는 예술을 철학적으로 논하면서 예술의 두 가지 특성을 일차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 하나는 예술의 “목적 형태 (Zweckform)”이며, 다른 하나는 “넘쳐흐르는 예술적 표현 (ausdrucksvolle Überschwang)”이다. 전자는 실천적 생산 원칙으로서 예술 작품을 생산하게 된 예술가의 직접적 계기 및 생업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후자는 미적 생산 원칙으로서 작품 속에 훌륭하게 형상화된 예술적 표현을 지칭한다. 블로흐에 의하면 과거의 예술은 상기한 두 가지 원칙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예술적 생산의 계기로서의 목적 형태를 “넘쳐흐르는 예술적 표현”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니라 기술 발전이다. 기술 문명의 발전은 예술 작품의 실천적 생산 원칙 그리고 미적 생산 원칙을 분리시키도록 작용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기술 발전을 통해서 만인을 위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뒤이은 장에서는 예술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 거론되고 있다. 첫 번째 고대 그리스 예술은 “삶 그리고 엄밀성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이른바 행복 추구의 균형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대립되는 것은 두 번째 고대 이집트의 예술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돌과 같은 기하학적 죽음의 경직된 상”을 열광적으로 추구하였다. 여기에는 자신의 유한한 삶을 말하자면 어떤 무한한 죽음 이후의 세계와 동질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예술적인 형이상학적 상의 세 번째 형태가 출현한다. 그것은 바로 “마치 부활과 같은 새로운 변화된 삶을 갈구하는 고딕 형식”을 가리킨다.
여기서 블로흐는 표현주의라는 예술 사조를 “고딕의 선험적 정신을 그대로 간직한 하나의 형태”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표현주의 그리고 고딕은 자아의 어떤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초월을 강력하게 갈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한결같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동체의 기본적인 비밀을 시사해주지 않는가? “자기 자신의 변화”, “우리 존재 속에 도사린 비밀” 내지 “우리에 관한 문제” 등은 블로흐의 핵심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블로흐는 이러한 개념을 거론함으로써 자아라는 협소한 영역으로부터 탈출하고, 부 자유로부터 해방 (Exodus)되어, 마침내 신을 섬기는 공동체로서의 묵시론적 공동체 내지는 유토피아로서의 자유의 나라로 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은폐된 자아는 여전히 자신 속에 숨어 있을 뿐 밖으로 나와 활개치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가 상기한 방식으로 해방된다면, 자아는 마침내 비로소 인간의 면모를 지니게 되리라고 한다. 블로흐는 전체로서의 역사를 기존하는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출발로 고찰하고 있다. 역사는 블로흐에 의하면 “마지막 그리스도 형태의 공동체”로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음악의 철학」이라는 상당히 방대한 장에서 블로흐는 예술적 장르 가운데 특히 음악의 장르를 강조한다. 음악은 부자유의 질곡을 벗어나서 해방으로 나아가게 하는 갈망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음 자체는 문학에서 나타나는 단어들과는 달리 그 자체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는다.
음이라는 순수성 그리고 빈약한 의미론적 차원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음악은 다음의 사항을 가능하게 한다. 즉 음악은 오래 전부터 어떤 다른 진리를 찬양하고, “구성적 환상”을 떠올리게 해주지 않는가? 따라서 블로흐는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원초적이고 새로운 철학을 제시하는 장르로서 음악을 꼽고 있다. 음악이 지향하는 미지의 무엇은 결국 철학의 영역에서 거론되는 “구성될 수 없는 질문의 형체”로 이해될 수 있으며, 나아가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물음과도 관계된다.
루드비히스하펜에 있는 에른스트 블로흐 아카이브
상기한 내용을 통하여 블로흐는 이러한 문제의 윤리적 인식론적인 입장을 그대로 드러낸다. 블로흐에 의하면 헤겔은 범 논리적 조직 체계를 너무 일찍, 너무 성급하게 완성한 철학자이며, 칸트는 순수 이성, 특히 실천 이성의 제한된 가능성을 서술할 때 존재와 당위의 구분을 너무 확고하게 구분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요구의 논리학으로 향한 길 그리고 시대의 진정한 주관적 윤리의 형이상학으로 향한 길 등은 신으로부터 멀리 동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칸트가 가상적으로 떠올린 정언적 명제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칸트의 정언적 명제 속에는 어쩌면 미래의 희망으로서의 “아직 아니다”가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인간 동물은 기억과 예언 사이에 서성거리지 않는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바라보지 못하는 어떤 맹점 (盲点) 속에, 충만한 삶의 순간이라는 어두움 속에 도사리고 있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철학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이 유일한 문제이다. 그것은 가치에 관한 모든 문제를 결합시킨 것이며, 자신과 우리에 관한 모든 문제가 하나로 요약된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은 철학의 기본 원칙에 대한 궁극적 해명이 아닐 수 없다.”
"유토피아의 정신" 마지막 장에는 카를 마르크스, 죽음 그리고 묵시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여기서 블로흐는 넓은 범위에서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이 끼친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어떤 더욱더 완전한 국가를 낳게 하기 위한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블로흐는 마르크스의 무신론적이고도 현세 지향적인 입장 대신에, “자유의 나라”라는 어떤 진정한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운다. 바로 이러한 자유의 나라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자유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한다. 자유의 나라는 묵시론적이고 유토피아적 의미에서의 마지막 상태를 가리킨다. 역사 내지 과정으로서의 세계는 -만약 어떤 절대적으로 목적 없는 상태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는- 어떤 절대적인 전체성 속에서 자신의 메타 우주적인 경계선을 분명히 긋게 되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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