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쉬 5

서로박: 헤름린의 스카르다넬리

1970년 「의미와 형식」에 발표된 슈테판 헤름린 (1915 - )의 방송극 "스카르다넬리"는 횔덜린의 다른 이름이다. “스카르다넬리 Scardanelli”, 그는 누구인가? 실제로 살았던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횔덜린인가? 부오나로티 Buonarotti, 살바토레 로자 Salvatore Rosa는 이름과는 달리 세상을 붉게 구원하지 못하고 사라진, 당시 19세기의 무명 시인, 횔덜린의 가명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슈테판 헤름린은 프랑스 팔레스티나 등지를 돌아다니며, 반 나치 저항 운동가로 활약하였다. 전후 구동독 지역에 정착한 그는 "대도시에 관한 12개의 담시들" 및 반파시즘 활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탁월한 중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헤름린은 구동독 지역에서 여러 명의 문화 ..

45 동독문학 2022.01.05

서로박: 자라 키르쉬의 서정시 (2)

자라 키르쉬 (Sarah Kirsch, 1935 -)의 본명은 잉그리트 베른슈타인입니다. 베르슈타인이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흔적이 엿보입니다. 어쩌면 그미의 집안에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자라 키르쉬의 아버지는 이를 은폐하고 순수 독일인임을 자처했습니다. 나아가 그미의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교회 중심으로 사고하였습니다. 그에게 무신론이란 바로 죄악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부계 혈통의 어리석은 생각을 징벌한다는 의도에서 자신의 이름을 일부러 유대인 특유의 “자라”로, 성을 “키르쉬”로 달았던 것입니다. 자라 키르쉬의 시는 거친 강렬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인은 매끈한 문장, 조화롭고도 유연한 문체를 사용하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작품에 나타나는 것은 호..

45 동독문학 2021.09.15

서로박: 자라 키르쉬의 서정시 (1)

자라 키르쉬 (1935 -)는 1965년 당시의 남편 라이너 키르쉬와 함께 엔솔로지 "공룡과의 대화 (Gespräch mit dem Saurier)"를 간행했는데, 이를 계기로 처음 시를 발표하였다. 그미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했고, 1963년에서 1965년 사이에 라이프치히에 있는 요하네스 베혀 연구소를 다녔다. 초기 시의 경향은 새로운 서정적 자아의 일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동년배 시인 라이너 쿤체, 귄터 쿠네르트, 폴커 브라운 칼 미켈 등의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던 성향이기도 했다. 1965년 이래로 동독 문학의 새로운 서정적 음색은 당 문화 관료들의 저항에 맞서서 자신의 문학적 경향을 관철시켜야 했다. (1) 1970년에 간행된 "시골 체류 (Landaufenthalt)"는 그미의 첫..

45 동독문학 2021.09.15

키르쉬와 퓌만

자라 키르쉬 (1935 -2013)는 동독의 사포라는 별명을 지닌 시인입니다. 연애시가 탁월합니다. 그만큼 한 인간의 열정과 사랑 그리고 우정과 정치를 치밀할 정도로 냉정하게 시작품으로 남긴 동독 시인은 없었습니다. 사진은 2008년에 73세의 나이에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자라 키르쉬가 태어난 생가입니다. 그미는 1935년 튀링겐 지방의 림링거로데에서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미의 아버지는 TV기술자였습니다. 이는 그미로 하여금 나중에 생물학을 전공하게 작용하였습니다. 1965년 당시의 남편, 라이너 키르쉬와 함께 엔솔로지 "공룡과의 대화 (Gespräch mit dem Saurier)"를 간행했는데, 이를 계기로 처음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참고로 그리스 시인, 사포 Sappho (BC. 6..

9 문학 이야기 2019.05.29

서로박: 80년대 동독 작가와 스타지

친애하는 H, 신진 작가들의 문학관 및 구동독에 대한 상을 논할 때 우리가 특정 작가를 예로 들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프렌츨라우어 베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들은 상당히 많으며, 상당수의 작가들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 전에 이미 서독으로 이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특정 작가를 거론하는 대신에, 일반적 특성만을 조심스럽게 지적할까 합니다. 50년대에 출생한 젊은 작가들은 대체로 체코의 침공에 대해 항의하다가 투옥 당했으며, 결국 서독으로 송치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구동독에서 이름 있는 작가들은 구서독에서 책을 간행하게 했습니다. (이는 구동독에게는 불리한 것이었지만, 결과론적으로 고찰할 때 동서독 교류를 활성화시키게 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대부분의 신진 작가들은..

45 동독문학 2017.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