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헤름린의 스카르다넬리

필자 (匹子) 2022. 1. 5. 11:39

1970년 「의미와 형식」에 발표된 슈테판 헤름린 (1915 - )의 방송극 "스카르다넬리"는 횔덜린의 다른 이름이다. “스카르다넬리 Scardanelli”, 그는 누구인가? 실제로 살았던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횔덜린인가? 부오나로티 Buonarotti, 살바토레 로자 Salvatore Rosa는 이름과는 달리 세상을 붉게 구원하지 못하고 사라진, 당시 19세기의 무명 시인, 횔덜린의 가명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슈테판 헤름린은 프랑스 팔레스티나 등지를 돌아다니며, 반 나치 저항 운동가로 활약하였다. 전후 구동독 지역에 정착한 그는 "대도시에 관한 12개의 담시들" 및 반파시즘 활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탁월한 중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헤름린은 구동독 지역에서 여러 명의 문화 관료들과 마찰을 겪기도 하였다. "스카르다넬리"는 거의 인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작가의 발언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주제를 찾아내는 작업 역시 무척 어려우며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일단 헤름린의 작품에 나타나는 세 가지 특성을 지적함으로써 작품의 주제에 근접해 보려고 한다.

 

갇혀 살아가는 스카르다넬리

 

첫째, 헤름린은 1805년 이후의 병든 시인의 상황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등장인물 가운데 어느 누구도 병든 ‘횔덜린’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며, 시인 역시 자신의 이름이 스카르다넬리라고 말한다. 둘째, 방송극이라는 장르 및 몽타주 기법의 사용에서 우리는 헤름린의 집필 의도를 찾아낼 수 있다. 구동독에서 소홀히 다루고 있는 장르 및 몽타주 기법을 의도적으로 택한 것은 문학 기법을 통한 저항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헤름린은 이로써 함구무언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남아 있는 것은 여백뿐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보여주고 있다. 셋째, 괴테 실러와 횔덜린의 관계는 동독의 문화 정책과 비판적이고 독자적 입장을 취하는 구동독 작가와의 관계에 대한 비유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세 가지 특성을 보다 세밀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헤름린은 1805년 이후의 병든 시인의 상황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방송극은 총 15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장마다 ‘횔덜린’의 과거사는 병든 시인을 찾아간 두 사람의 무명의 인물에 의해서 유추되고 있다. 병든 ‘횔덜린’의 생활은 빌헬름 바이블링거 Wilhelm Weiblinger의 회상기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삶, 문학 그리고 광증" (1830)을 토대로 묘사된다. 등장인물들의 발언은 제각기 다른 맥락에 의해 나온 것이며, 인용문들과 결합되어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로 ‘횔덜린’의 발언 (인용문)은 등장인물의 발언과 뒤섞여 때로는 더욱 강한 의미를 부각시키나, 때로는 비판적 거리감을 야기한다. 기이하게도 ‘횔덜린’과 다른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자기 자신의 이름을 감추려고 애쓰는 작가와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필자가 앞에 인용한 글을 살펴보자. 이 대목은 ‘횔덜린’의 정서 상태를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마음을 딴 곳에 두고 있다. (...) 가장 가까이 있는 사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자신을 무장하는 어떤 약점 속에 살고 있다. 낮과 밤을 보내며 느끼는 불안은 끔찍할 정도이다. 이에 대한 원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한다.(고딕체 필자) 앞부분이 실제로 바이블링거의 발언인 반면에, 고딕체 부분은 작가 헤름린의 발언이다. 약점이란 심리학적으로 ‘자아의 존재론적인 안정이 결여된 부분’을 지칭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어떤 사물을 대하면 심리적으로 커다란 동요를 일으킨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이 사물은 그 사람의 약점을 자극한 셈이 된다.

 

그렇다면 무장화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외부의 사회적 심리적 자극이나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차단시킨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껍질이 딱딱한 갑충을 연상해 보라. 그러므로 여기서 자신을 무장하는 것은 외부적 요건이지, -정신분석학적 이론에서 언급하는- 내적인 공허나 체내의 반응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횔덜린’은 외부적 강요나 억압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원인을 아는 사람은” 헤름린에 의하면 “아무도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혁명적 작가 자신과 이에 적대적인 외부 세계 사이의 갈등을 주시해야 한다.

 

둘째, 방송극이라는 장르 및 몽타주 기법의 사용에서 우리는 헤름린의 집필 의도를 찾아낼 수 있다. 구동독은 유독 문학 장르 가운데 시, 소설 그리고 드라마의 삼 원칙만을 강조해 왔다. 장르에 관한 논의는 특히 구동독의 모더니즘 논쟁에서 첨예하게 드러난 바 있다. 방송극은 매스컴 및 ‘기계 제일주의’에 바탕을 둔 실험 문학이기 때문에, 구동독의 문화 관료들에 의하면 발전시킬 필요가 없는 장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헤름린은 의식적으로 방송극이라는 장르를 선택하였는지 모른다. 그 까닭은 다음의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헤름린은 자신의 직접적인 발언 대신에 인용문으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작품 속에는 횔덜린의 편지, 작품 그리고 기타 다른 문헌 등에서 인용한 글들이 몽타주 기법에 의해 삽입되어 있다. 여기서 간략하게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도록 하자. 첫째, 헤름린이 시도한 형식적 요소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틀을 박차고 나오려는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담고 있다. 70년대 동독 문학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작가의 명시적 표현보다는 묵시적 표현이나 여백을 읽어내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면 작품 속에 더 이상 표현될 수 없는 어떤 무엇은 독자로 하여금 어떤 여백을 유추하게 하며, 자의식을 동원하여 그러한 자기 검열의 여백을 채우게 한다.

 

 

셋째, 괴테 실러와 횔덜린의 관계는 동독의 문화 정책과 비판적 독자적 입장을 취하는 구동독 작가와의 관계에 대한 비유로 이해될 수 있다. 동독은 독일 고전주의 작가를 우위에 둠으로써, 비판적 독자적 사회주의가 지향해야 할 계급투쟁과 노동 해방을 토대로 한 새로운 문화의 실현 가능성을 약화시켰다. 이를 고려할 때 횔덜린과 같은 작가는 전적으로 문화 정책적 강요 및 사회 발전의 정체성속에서 시달리는 지식인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베른하르트 라이스트너 Bernhard Leistner는 저서 "어느 고전주의자를 둘러싼 불안. 현대 동독 문학에서의 괴테 인용"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지만, 70년대 동독 문학에서 나타난 괴테 인용은 고전 문학의 적극적 수용 및 긍정적인 전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권위에 대한 회의 등의 부정적 요소를 아이러니하게 지적할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헤름린은 특히 제 3장에서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이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 실제로 ‘횔덜린’은 1794년 예나로 가서 피히테의 강의를 듣고, 그해 11월에 실러의 주선으로 괴테와 헤르더를 사귀게 된다. 그러나 괴테는 시종일관 문화적 교황처럼 행세한다. 괴테의 눈에는 ‘횔덜린’은 마치 작품 발표를 구걸하는 무명 시인처럼 보일 뿐이다 (스카르다넬리 16페이지). 실러 역시 바쁜 업무를 핑계로 ‘횔덜린’을 만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횔덜린’의 시작품이 주관주의적이고, 격앙되어 있으며, 일방적인 이상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뿐이다. “실러 참사관님, 나는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만났을 때 내가 당신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존재임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16 페이지)

 

더욱이 마지막 장에서 괴테는 심지어 ‘횔덜린’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하며, 실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를 “홀터라인”이라고 명명할 정도였다 (42 페이지). 신진 작가에 대한 괴테와 실러의 보이지 않는 살인 행위는 구동독에서 문화적 교황으로 자처했던 알프레트 쿠렐라, 빌헬름 기르누스 등의 신진 작가들에 대한 탄압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헤름린 역시 당국으로부터 심한 추궁을 당한 적이 있었다.

 

베를린 아카데미의 문학예술 분과 위원회에서 일하던 그는 1962년에 서정시의 밤을 개최하였다. 이때 그는 자라 키르쉬 (S. Kirsch), 볼프 비어만 (W. Biermann), 폴커 브라운 (V. Braun) 등과 같은 신진 시인들의 시를 낭독하였다. 뒤이어 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제기된 것은 당국의 문화 정책에 관한 비판적 발언들이었다. 이로써 헤름린은 베를 아카데미의 직책을 물러나며, 반성문을 써야 했다. 그 이후로 헤름린은 절필에 들어갔으며, 70년대에야 비로소 방송극 "스카르다넬리"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사건의 고백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