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박설호: (2) 브레히트 이후 독일 최대의 경악의 기록자, 하이너 뮐러

필자 (匹子) 2025. 3. 29. 10:59

(앞에서 계속됩니다.)

 

3.

친애하는 K씨, 뮐러의 문학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작가가 살았던 현실 및 그곳의 문화 풍토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서방 세계에서의 뮐러 문학에 대한 해석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혹자는 과격할 정도로 파괴적인 실험적 특성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문예 이론에 대한 일종의 배반으로 설명하였습니다. 혹자는 뮐러의 문학을 계몽에 대한 거대한 비판적 담론으로 받아들여,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속으로 편입시켰습니다. 또한 혹자는 문학 작품에 겉으로 드러난 작중 인물들의 비극적 최후 내지는 죽음을 중시하며, 뮐러 문학에서 ‘역사적 패배주의’라는 문제점들을 발견하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러한 해석의 다양성 자체를 힐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있어요. 독자의 반응이 작가의 고유한 의도를 180도 전복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요? 아무리 가다머의 해석학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한계 속에서 가능하지 않을까요?

 

K씨, 우리는 일단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뮐러 문학을 거론하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교묘한 이데올로기가 부분적으로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분단의 시대에 뮐러를 포함한 동독 문학 전체가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수용된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서구 다원주의 사회의 선거 전략 내지는 이른바 서구 다원주의 사회의 관대함을 자랑하기 위한 과시 효과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 뮐러 문학을 역사적 패배주의와 관련시키는 태도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뮐러의 문학은 의도적으로 그리고 표현 형식상의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충격과 은폐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욱이 작품의 등장인물에서 작가의 발언이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십시오. 물론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뮐러 문학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를 제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작품에 드러나는 현실상과 작가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상 사이의 차이를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뮐러 문학은 이현령비현령으로 곡해될지 모르니까요.

 

4.

가령 볼프강 하리히 (W. Harich)는 1973년에 뮐러의 「맥베스」를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하리히의 견해에 의하면 극작가는 문명 비판의 강도를 지나칠 정도로 내세워, 관객들로 하여금 “쓸모없는” 문화적 비관주의를 수용하게 한다는 것이었지요. 따지고 보면 하리히와 뮐러의 의견 대립은 단지 작품의 세부적 형상화에 관한 견해 차이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었고,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에 관해서 뮐러는 자신의 대담기, 󰡔전투 없는 전쟁 Krieg ohne Schlacht󰡕에서 약간이나마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하리히는 루카치 이론에 지나치게 경도한 반면에, 뮐러는 루카치 이론 자체를 예술을 구속하는 철칙으로 간주하고, 이를 처음부터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이로써 하리히는 원래의 유산을 무 작위적으로 변형시키는 작가의 작업을 비난하면서, 조금도 때 묻지 않은 문화 유산, -자신의 비유에 의하면- “술통에서 방금 짜낸 신선한 고전주의 eine frisch vom Faß abgezapfte Klassik”의 오래된 술맛을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사회주의 문학 이론에 대한 입장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일까요? 하이너 뮐러가 비평문을 집필하지는 않았으므로, 이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자료들을 쉽사리 구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볼프강 하리히의 변화된 (?) 예술관에 있습니다. 50년대에 하리히는 브레히트를 옹호하여, 모든 예술적 실험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60년대에 이르러 그는 옛날에 부분적으로 비판했던 루카치의 문예 이론을 긍정적으로 재론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모호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하리히가 어떠한 이유에서 과거의 예술관을 미련 없이 저버렸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시대적 변화 때문이었을까요?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리히의 비판으로 인하여 하이너 뮐러가 표현상의 자유를 어느 정도 상실하게 되고, 극작가로서의 자신의 입지도 현저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5.

오늘날 우리는 어쩌면 루카치 문예 이론의 한계를 이론 내부에서 찾아야 할 게 아니라, 이론의 외부에서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하이너 뮐러는 언젠가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루카치는 일도양단의 이론가였지요. 그는 원하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이용당했습니다. 바로 그 스탈린주의자에게는 말하자면 이론의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루카치의 정치적 감각이 뒤떨어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화상으로 일하기도 했던 루카치는 항상 자신의 입지와 권력다툼에 골몰하는 문화 관료들의 술수를 앞지를 수 없었지요.)

 

실제로 뮐러는 이론 중심주의가 낳는 폐해에 관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숙지하고 있었고, 또한 그것이 권력에 이용당하는 과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론 자체의 가치 여부를 논하기 이전에, 이론의 가장자리를 교묘하게 휘감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베일이 진정한 자유 토론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K씨, 아닌 게 아니라 이론은 어디서 고찰하느냐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지요. 안으로 파고들면, 우리는 이론이 명실상부한 내적 논리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바깥에서 고찰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이론이 모든 대상을 일도 양단하는 작두 내지 인간을 구속하는 어처구니없는 새장 (Käfig)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아니 동물원 울타리에 갇힌 사육사를 생각해 보세요.) 따라서 이론이란 자유로운 토론을 가능케 하는 민주적인 학문적 풍토가 온존하는 사회에서는 합리적 결론을 도출할 뿐 아니라, 바람직한 방향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이론은 주로 권력과 금력을 고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 이용 당하곤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뮐러는 예술 작품을 난자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루카치 이론을 포함한) 제반 미학 이론을 비판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