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8.
그밖에 우리는 뮐러 문학에서 투영되고 있는 활력주의의 요소, 여러 가지 형태로 태동할 수 있는 여성 운동에 대한 기대감 등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가령 구동독에서 만연했던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적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뮐러는 수직적 구조의 세계관 (오성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 그리고 재화 중심주의)을 비판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다른 작가들도 이에 관해 문학 작품을 통해 혹은 다른 방식으로써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만, 그것을 유달리 강한 어조로 폭로한 작가는 다름 아닌 하이너 뮐러였습니다.
“18세기, 쾨니히스베르크의 토요일 오후 세시. 임마누엘 칸트. 그의 철학적 사고와 그의 수음 (手淫) 행위 - 후세 사람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그의 사고만을 생각하고, 너무나 오랫동안 그의 행위를 잊었다.” 인용문은 비단 야누스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특성 뿐 아니라, 권위적 학문 우월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그밖에 우리는 뮐러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향락과 섹스에 대한 제한 사항을 떨쳐버리는 일은 어떤 보다 더 인간적인 문화의 전제 조건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동물화, 동물성과의 화해가 아울러 문제시된다.” 친애하는 K씨, 뮐러의 이러한 발언 속에 담긴 태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다 인간적인 문화, 관대한 사회 풍토 그리고 “타인에 대한 두려움 Xenophobie”의 극복 바로 그것들입니다. 이는 지금까지의 근엄하고 경직된 제반 계율을 서서히 무너뜨릴 때 실천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는 이에 관한 타당성 여부를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관대하고 유연한 문화적 풍토는 민주주의 뿐 아니라, 인간의 행복 실현에 필수 불가결하다고 믿고 싶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칸트와 헤겔을 거론하는 몇몇 사대주의 철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발언이 오직 음탕하고 칙칙한 이야기로 이해되겠지만 말입니다.
9.
바람직한 문학 연구서라면 K씨와 같이 독문학 혹은 연극 분야에 뜻을 둔 젊은이들에게 필독서로 작용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세밀한 하이너 뮐러 연구서를 간행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작년 초에 몇몇 뜻있는 젊은 학자들에게 편지를 드려, 뮐러 연구서를 간행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마침내 나를 포함한 아홉 분이 거사 (?)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우리 대부분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 일을 함께 하기 전에는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출신 지역도 다르며, 다녔던 학교도 다르지요. 말하자면 남남끼리 하이너 뮐러 연구서의 간행을 위해 한자리에 어색하게 모인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전에 뮐러 문학에 대한 어떠한 특정한 입장을 의도적으로 “조율”하여, 그것을 일원화시킨 바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씨족 이기주의에 바탕을 둔 문화적 섹트주의를 처음부터 거부하였습니다.
출간 이후에는 이른바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우리 모임을 존속시키지 않을 테니까요. 이 점은 본 연구서의 취약점으로 작용할 것 같아 노심초사하였습니다. 한 권의 책 속에 상반되는 견해들이 뒤섞이면 혼란스럽기 십상이니까요. 그렇지만 때로는 올바른 다양성이 거짓된 일원성을 몰아내기도 합니다. K씨도 책을 읽으면 아시겠지만, 본 연구서의 제반 입장들은 (사전에 아무런 전제 조항이라든가 단서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커다란 편차를 띄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아홉 분의 논문이 거의 완성될 무렵에 뮐러 작품의 한국어 표기 문제를 약간 논한 것 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견해들이 그다지 상반되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우리가 동서독의 문화권 밖에서 살고 있고, 통독의 과정에서 아무런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10.
친애하는 K씨, 뮐러의 무덤과 그 앞에 선 나의 모습이 다시금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군요. 지금쯤이면 뮐러의 무덤 앞에 비석이 마련되어 있을까요? 땅속의 하이너 뮐러는 마치 다음과 같이 나에게 일갈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네, 내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천사의 알을 맛볼 텐가... 그것은 자유로운 삶에 관한 비유야... 어쩌면 사회주의에 관한 비유일지도... 혹자는 타원형이라고 하고, 혹자는 일부가 찌그러진 원형이라고 말한다네... 그러나 사람들은 내부를 알지 못할 거야... 알속에 담겨 있는 꿈틀거리는 흰자위와 노른자위 그리고 생명의 꿈틀거림 말이야... 굳어버린 대가리로 그들은 항상 껍질만 가지고 꼬장꼬장 따지니까.. 내가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었던 일은 다만 물귀신 작전이었어.. 나는 자유의 나라를 설계할 수 없다네... 천사의 알을 먹어보지 못했거든... 그렇지만 돌이켜 보건대 내 평생의 과업은 안타깝게도 천사의 알을 맛보는 일이 아니었어... 그저 알의 표면에 묻어 있는 수많은 사악한 박테리아들을 제거하는 일 뿐이었지... 그게 삶이야 (C‘est la vie)... 환갑에 사람 되고 진갑에 죽는다더니...”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천사의 알을 접하거나 시식 (試食)할 때를 맞이하겠지요. K씨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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