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글은 김형기 외 하이너 뮐러 연구의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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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하게 될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의 세기에는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코메디일 것이다.” (하이너 뮐러)
“대담자: 하이너 뮐러씨, 걸프 전쟁에 즈음하여 지식인으로서 어떠한 비판적 발언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뮐러: 그건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대담자: (황당한 듯 침묵을 지킨다) 뮐러: 지식인의 시대는 끝났어요. 지식인은 그저 나처럼 TV만 쳐다보면 족할 뿐입니다.”
1.
친애하는 K씨, 맨 먼저 다음의 말을 전하고 싶군요. 당신을 위해서 뮐러 연구서가 간행되는 데 대해 나는 지금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는 나 뿐 아니라, 여기에 참여한 모든 필자들도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이너 뮐러는 1995년 12월에 66세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1996년 봄에 베를린에서 그를 찾았을 때, 그의 시신 (屍身)만이 도로테엔슈타트 묘지에 묻힌 채, 아는 듯 모르는 듯 낯선 동양인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서양이라 봉분 (封墳)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다는 그곳의 한 평 남짓한 땅, 특권층만이 묻힐 수 있는 묘지. 그곳에는 유태인 무덤이라곤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피히테, 헤겔, 브레히트, 제거스, 하인리히 만 등의 묘비들. 그들의 개혁적 발언은 전혀 수용되지 않았으나, 얼마나 많은 권력 지향적 속물들과 아무 것도 모르는 소시민들이 그들의 시신 앞에서 묵념을 올렸던가요?
문득 귄터 쿠네르트 (Günter Kunert)의 시, 「도로테엔슈타트의 묘지에 대하여」가 생각이 났습니다. “죽은 작가들의 묘지에는/ 언어의 무력함에 대해/ 권력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육중한 비석에 실린,/ 힘없는 해골과는 무관한/ 다만 경솔하기만 한 거짓말/ 생존자들에 대한 바리케이드/ 이들이 여기서 판에 박힌/ 어떤 생각에 갇히도록,/ 계속 어떤 이용 가치에/ 귀속되어 버리도록/ 이전에나 이후에나 간에.// 너와 같은 조객 (弔客)들은/ 검은 양복에 근엄한 표정을 강요당한 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있다,/ 정해진 곳으로 향하는 곳에서/ 발바닥에 밟히는 낙엽들의/ 가련한 외침과 경고를.” 권력... 힘없는 해골... 말하자면 구동독은 비판적 지식인들을 애국적 지식인들로 매도함으로써 시신들을 다시 한 번 살해하고 있었습니다... 정령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진 그들의 꿈과 고뇌들... 눈먼 시간들... 무심한 세상과 잿빛 구름...
하이너 뮐러의 무덤을 찾는 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요. 무덤 위에는 작은 꽃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고, 묘비 대신에 ‘하이너 뮐러’라고 씌어져 있는 작은 나무 팻말만 초라하게 꽂혀져 있었습니다...
2.
죽기 전에 뮐러는 「꿈 텍스트 1995년 시월」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떠나네, 나의 딸, 그미는 두 살, 대나무로 짜 맞춘 광주리 속에 넣어, 등에 짊어지고, 나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거대한 물탱크, 가장자리에 난간도 없이 좁은 콘크리트 길을 따라, 빙빙 도는 나의 걸음걸이의 방향 (이게 나의 유일한 선택이지) 에 따라, 드디어 뛰어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콘크리트 장벽이 생기고 있네.”
친애하는 K씨, 예순이 넘은 어느 노인이 갓 태어난 딸을 대나무 광주리에 넣고, 딸의 안녕을 위하여 콘크리트 사이로 끝없이 선회하는 상(像)을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눈물겨운 장면이군요. 내용상 극작가 자신의 사생활의 차원을 뛰어 넘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실제로 뮐러는 나이 예순이 넘어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고, 대 수술 후에 자신의 죽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 상(像)은 틀림없이 뮐러의 평생 문학적 행적(行跡)에 대한 비유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광주리 속의 어린 딸은 이상으로서의 ‘평등 사회에서 바르게 살아갈 생명’을 지칭할지 모릅니다. 좁은 콘크리트길과 장벽은 어쩌면 오랫동안 작가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고, 작가의 신변을 위협하던 살얼음과 같은 뮐러의 역정(歷程)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텍스트들만 마치 유물처럼 우리에게 의구심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구심을 정당하게 해석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닐까요? 뮐러의 선험자, 브레히트는 유작 시 (遺作詩)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나를 잊어라, 부탁한다. 그래야 나의 나쁜 선례 (先例)가/ 너희를 유혹하지 않을 테니까/ (...) 그러니 허송세월을 보낸 나를/ 멀리 하라. 다만 우리의 썩은 주둥이에서/ 나오는 계명을 지키지 않도록/ 스스로 요구하라, 실패한 자들로부터/ 어떠한 충고도 받아들이지 말고,/ 다만 너희에게 좋은 것을/ 스스로의 입장에서 결정하라 (...)”
그러나 K씨, 당신 같은 젊은이는 “나쁜 선례”에서 나쁜 점을 부분적으로 추출해내어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선례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선별적으로 수용한다면, 만약 작가, 작품 그리고 사회를 특정한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면, 떠나간 작가의 작품들은 비교적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을 테니까요. (정민영: 하이너 뮐러 극작론, 사랑의 학교 1998.)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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