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6. 유럽 지식인들의 냉담성에 대한 비판
다시 브라운의 극작품으로 돌아가자. 만일에 「게바라 혹은 태양의 나라」에 막간극 (제 1장, 제 5장, 제 9장)이 실리지 않았더라면, 브라운의 극작품은 숙명론적인 역사극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막간극이 실려 있기 때문에, 역순에 의해 묘사되는 게바라의 행적, 특히 갈등과 희망 등은 독자와 관객에게 갈등과 모순 구조를 점층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보다 강렬한 주제 의식을 심화시켜 준다.
막간극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붐홀트와 베드레이이다. 이 두 인물은 실제 유럽의 지식인, 알렉산더 훔볼트와 레기스 데브레이에 대한 패러디이다. (역주: 빌헬름 폰 훔볼트 (1769 - 1859)는 잘 알려진 자연 과학자로서, 게오르크 포르스터,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과 교우하였다. 그는 1799년과 1804년 사이에 베네주엘라, 쿠바, 콜롬비아, 에쿠아도르, 페루 그리고 멕시코를 거쳐 미국을 경유하여 유럽으로 되돌아 왔다. 그의 여행기 "신대륙의 적도 지역에 관한 여행기 (Voyage aux région equinoxales du Nouveau Continent)"는 총 36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방대한 문헌이다. 훔볼트는 처음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어리석고 냉담하며 게으른 인간들로 비난하였으나, 이들에 대한 그의 선입견은 나중에 서서히 변하게 된다. 레기스 데브레이 (1940 - )는 철학을 전공한 프랑스 작가로서 사회 혁명에 대한 이념을 신봉하며, 게릴라 무장 투쟁을 지지하였다. 1967년에 간행된 그의 책 "혁명속의 혁명 (Révolution dans la révolution)"은 남미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데브레이는 체 게바라를 지지하다가 1967년에서 1970년까지 볼리비아에서 옥살이하였다. 70년대 이후에 그는 좌익 혁명의 이념을 저버리고 프랑스 사회당에 가담한다. 1981년에서 1985년까지 미테랑의 제 3세계 문제의 자문 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재하는 인물 훔볼트와 데브레이에 관한 사항은 막간극의 주제를 고려할 때 주변적 자료 이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보편적 인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붐홀트의 행동은 유럽 우파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적 공격 성향 내지는 야만성을, 베드레이의 행동은 현실 도피적 추상성을 대변하고 있다.
미국 여행자 차림의 붐홀트는 멸망한 ‘태양의 나라’를 발견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 있다. 이에 비하면 체크 양복 차림의 베드레이는 암벽위로 올라가서 게릴라들의 모습을 관망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붐홀트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베드레이는 사회 개혁에 수수방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역주: 게바라의 면모는 오늘날 기껏해야 의상실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다만 역사가들만이 마치 나방처럼 그의 유니폼의 천속에 안주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H. M. Enzensberger: E. G. de la S., in: Theater heute, 1/ 1978, S. 10.)
다시 말하면 전자는 지하에, 후자는 공중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땅위에서 발생하는 실제 삶 내지는 정치적 현장을 결코 중시하지 않는다. 이들의 대화에서 특이한 두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두 지식인들은 자신의 선험적 사고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발언 역시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대화는 전혀 의사소통을 이루지 못한다. 둘째로 두 사람은 상호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지껄이고 있다. 이는 올바른 실천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극작품에서 게바라는 한계 상황에서 처절하게 행동하는 반면에, 막간극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희극적이며, 그들의 대화는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게 한다.
제 5장에서 베드레이는 카스트로의 혁명 이론 및 브레히트의 발언을 인용하며, 암벽을 올라간다. 그리하여 그는 목이 잘려 머리통을 아래로 떨어뜨리게 된다. (GS. S. 143). 이는 하나의 비유이지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 우리는 여기서 원칙 우선주의를 상정할 수 있다. 베드레이는 바람직한 이상의 원칙을 미리 설정해 놓고, 이를 현실에서 반드시 실현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다. 둘째, 우리는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상정할 수 있다. 베드레이는 추상적 이상에만 집착할 뿐, 전혀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머리통을 잃어버린 베드레이는 결국 반동적 유미주의를 견지하며, 아이헨도르프의 시를 읊고 있을 뿐이다.
제 9장에서 붐홀트는 머리통을 어느 발견된 시체와 접목시키며, 혁명가의 시체라고 거짓 주장한다. 결국에 그는 목이 달아난 베드레이를 사살하여, 몸통을 마구 뜯어먹고 만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클라우스 슈만은 막간극을 “사뮈엘 베케트 유형의 종말 극”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현대인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아포리아로서 추상화될 수는 없다. (역주:K. Schuhmann: Anmerkungen zu Volker Brauns 「Guevara oder der Sonnenstaat」, a. a. O., S. 33. ) 첫째로 주인공 게바라와는 달리 붐홀트와 베드레이는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오랫동안 말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말을 제대로 실천할 줄 모른다. 만약 이들의 말이 행동으로 이전될 때, 그것은 -특히 붐홀트의 경우- 자기 파괴적으로 타인을 공격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발언은 처음부터 나름대로의 이상을 지니고 있으나, 특히 붐홀트의 행동은 야만적으로 변하게 된다. (역주: 지엽적인 말이지만 두 인물은 프란츠 카프카의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교될 수 있다. 베드레이가 이기적이고 수수방관적인 연구 여행자와 유사하다면, 붐홀트는 기계적이고 행동적인 장교와 비교될 수 있겠다.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김천혜: 프란츠 카프카의 「유형지에서」, 김광규 편, 현대 독문학의 이해, 서울 1983년, 334 - 336.)
둘째로 유럽의 (특히 서구의) 지식인들은 실제 현실로부터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직업이 죽은 사람들에 관해 탐구하는 작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식인의 한계 내지는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는 의식의 편향을 상정할 수 있다. 셋째로 서구 지식인들의 사고는 게바라와 같은 제 3세계 운동가의 실천 행위를 완전히 수렴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럽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일방적 체험 영역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7. 나오는 말
지금까지의 분석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게바라는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창출하려는 목표를 위해 소위 무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했다. 그러나 극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듯이, 게바라에게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여러 가지 수단이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이러한 차단은 혁명 운동에 악재로 작용하는 여러 가지 모순점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모순의 해결을 통해서, 브라운은 바람직한 (공산주의적인) 사회가 창조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특히 게바라 극작품의 현실은 -「레닌의 죽음」에 묘사된 레닌의 현실에 비해- 구동독의 현실에 이전될 수 있다. 이로써 브라운의 극작품은 일종의 개방된 모델의 특성을 지닌 셈이다. (역주: 따라서 “브라운은 막강한 시인이나, 미약한 극작가이다”라는 볼프 비어만의 발언은 어떤 예외적 조건을 무시한, 주관적인 발언에 불과하다. Vgl. Wolf Biermann: Über das Geld und andere Herzensdinge, Köln 1990, S. 106.)
물론 브라운의 관심은 게바라의 삶과 혁명적 상황을 구동독 지식인과 정체된 사회주의적 현실에 비교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게바라 혹은 태양의 나라」의 주제 의식은 보다 확장된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브라운의 극작품은 -「레닌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90년대 유럽의 사상적 분위기를 예언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브라운이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은 20세기 말의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는 반 유토피아적 시대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가령 막간극에서 붐홀트가 베드레이의 살점을 뜯어먹는다는 점 등은 -본문에서 지적한 해석 외에-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변절 내지는 반 유토피아주의의 사고에 대한 패러디로 이해될 수 있다. 70년대 이후로 서구 유럽의 좌익 진보 세력이 현저하게 약화되었으며, 일부의 지식인들 (예컨대 앙드레 글릭스망)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등을 돌린 것을 생각해 보라. (역주:통독 후의 동독 문학 논쟁에서 서구의 비평가들이 (브라운을 비롯한) 구동독 작가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한 사실 역시 이에 대한 예일 수 있다. )
무릇 서구 지식인의 사상적 입장이란 유럽의 현실에서 파생된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유럽이라는 구체적 삶의 환경이 그들에게 어떤 나름대로의 견해를 부여한 셈이다. 과연 주어진 현실과 무관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견해가 설득력을 지닐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인간 삶의 무대가 유럽이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의 체험 영역이 확장되지 않으면, 우리는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으로 어떤 잘못된 (?) 입장을 제기할지 모른다. 걸프 만의 전쟁, 유고 사태 등은 현대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유럽 중심적인 일방적 시각을 수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역주: 예컨대 B. 슈트라우스, P. 헤르틀링 그리고 H. M. 엔첸스베르거 등과 같은 작가들은 골프 전쟁 (1991) 당시에 종래의 평화주의적 태도를 저버리고, 전쟁 지향주의자로 변신하였다. Siehe Formulierung von Alltagsutopie. Interview mit Oskar Negt, in: Forum Wissenschaft 4/ 1993, S. 28f. 이들의 시각은 사담 후세인을 히틀러로 비유하는 등, 유럽 중심주의적인 일방적 추상성에 근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발언은 약육강식에 근거한 미국의 전쟁 선포 및 이슬람 문화권의 입장을 은폐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오히려 역으로- 다른 문화권의 체험 현실을 토대로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투영하여, 객관에 합당한 입장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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