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4. 갈등과 모순 구조 (2)
(1) 게바라와 당과의 의견 대립
제 8장에서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공산당 제 일 서기를 만나 혁명적 노선에 관한, 서로 다른 의견을 교환한다. (역주: 이 대목은 작품의 발표 시기 및 극작가의 주변 현실을 고려할 때 구동독의 사회주의 통일당 정책 비판과 관련된다. 그렇기에 클라우스 슈만은 제 8장의 일부 (160 - 161 페이지)를 극작품속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규정하고 있다. K. Schuhmann: Anmerkungen zu Volker Brauns 「Guevara oder Der Sonnenstaat」, in: Text + Kritik, H. 55, a. a. O., S. 27 - 34, Hier S. 31ff.). 그러나 두 사람의 견해가 결코 좁힐 수 없게 되자, 게바라는 당과 결별한다. 이때는 카다비에서 탄광 노동자들의 데모가 발발한 직후의 시기였다.
이 데모에 직접 가담했던 인티는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 부대에 가담하게 되며, 당 서기인 몬제는 게바라를 찾아온다. 그의 방문 목적은 게바라의 혁명적 투쟁을 중단시키고, 지도 체계를 당 중심으로 재정비하기 위함이었다. 몬제의 견해에 의하면 개혁 의지를 지닌 모든 사람은 초지일관 강경책을 쓸 게 아니라, 때로는 협상과 계획을 통한 전략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가령 게바라의 강경한 태도는 다만 혁명적 초조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몬제는 비난한다. “초조함은 가장 더러운 엉터리 의사이네” (GS. S. 160).
더욱이 저항 세력이 분열하면, 이는 세력의 약화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민중들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장기전 내지는 온건책 등과 같은 다양한 전략을 구상해야 하며, 바로 지금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시점이라고 한다. 이로써 몬제는 게바라의 “혁명적 초조감” 및 “맹목적 행동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 무기에서/ 나오는 것은 세력이 아니라, 다만 폭력이야/ 무기로 많은 것을 행할 수 있으나/ 거기다 브레즈네프와 보나파르트의 인용을/ 덧붙일 수는 없지” (GS. S. 160f).
이에 대하여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당은 민중이 우매하여 영문도 모르고 착취당할 때에만 제 구실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 상황에서 민중은 이미 상당한 부분의 억압 구조를 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의 소극적인 협상 정책은 마치 ‘고도를 기다리려는’ 미온적 태도에서, 몇몇 엘리트들의 무사 안일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비록 몬제가 야권 세력의 분열과 혼란을 경고하고 있지만, 그는 -게바라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개혁주의자와 혁명가들을 오로지 ‘당’이라는 카테고리 속에 종속시키려고 할 뿐이다. 이로써 게바라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몬제의 주장은 일반 볼리비아 민중의 삶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서, 다만 하나의 원칙주의에 불과하다. 이러한 원칙주의는 처음부터 추상적으로 의도한 독단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둘째로 몬제의 주장은 관료 내지는 엘리트들의 권력욕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몬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과업보다는, 무엇보다도 “지도 체계의 승계”를 내심 중시하고 있을 뿐이다.
제 8장에서 게바라와 당 사이의 대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지금은 당 체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시대이다.” (GS. S. 161). (역주: 브라운은 「자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작품이 기록된 것은 오직 어떤 한 문장 때문이지요? - 모르겠습니다. - 그 문장은 ‘지금은 당 체제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이다’이겠지요? - 물론 당연히 그렇지요. - 감사합니다. - 멍청이 같으니라구.” (GS. S. 165) 극작품의 주제는 다만 사회주의 통일당 (SED)과의 관련성속에서 이해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게바라와 주변 인물들과의 여러 측면의 갈등 구조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 역시 횔덜린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연상시킨다. 아그리겐트 시민들이 엠페도클레스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엠페도클레스는 이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은 왕 체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시대이네.” 이로써 작가 횔덜린은 프랑스 혁명을 염두에 두며, 당시의 시대적 정황에 맞는 민주주의적 정신을 명확히 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브라운은 「게바라 혹은 태양의 나라」에서 사회주의 통일당의 낙후된 역할을 비판하고, 당 구조가 보다 민주주의적으로 변화될 것을 촉구하고 있는 셈이다. (역주: Vgl. V. Braun: An Friedrich Hölderlin, in: ders., Im Querschnitt, Halle/ Leipzig 1978, S. 26f.). 한마디로 게바라 극은 어째서 주인공이 무관심한 민중들 (제 2장), 가난한 대중들 (제 4장), 자신 (제 6장), 당 (제 8장) 나아가서는 쿠바의 친구 (제 10장)와 결별해야 하는가를 비판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2) 게바라와 카스트로와의 견해 차이
마지막 장은 게바라가 피델 카스트로와의 대화에서 약간의 견해 차이를 느끼고, 쿠바를 떠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스트로는 사회주의화된 쿠바 국가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부득이 주어진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생산 양식을 고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새로운 의식을 지닌 인간 역시 “먹고살아야 하나, 숟가락에 관해 질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GS. S. 169). 다시 말하면 새로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는 재화뿐이 아니라, 지배자 및 정책 구도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사회가 바람직한 구도로 건설되려면, -카스트로의 견해에 의하면- 생산력의 증가가 필수적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격 안정, 생산 품종의 전환, 무역 정책 그리고 고용 및 임금의 정책 등 수많은 난제가 당면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스트로는 주어진 생산 양식이 하루아침에 전환되는 것보다는 단계적으로 변화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우리 뒤에는 공산주의가 있네. 하지만/ 우리 앞에는 일상생활이 당면해 있어” (GS. 169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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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바라 역시 카스트로의 견해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생산력의 증가는 의식의 발전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것은 쿠바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바라의 견해에 의하면 혁명의 수단을 통해서 혁명적 근본 목표가 합리화될 수는 없다고 한다. (역주: 울리히 프로피틀리히는 이러한 문제를 언젠가 라살이 지적한 바 있는 혁명적 수단과 목표 사이의 갈등 내지는 혁명 행위에서의 아포리아의 위험성으로 비유하고 있다. U. Profitlich: Dialektische Tragik im DDR-Drama?, in: H. D. Irmscher (hrsg.), Drama und Theater im 20. Jahrhundert. Festschrift für W. Hinck, Göttigen 1983, S. 324f.)
문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쿠바의 상황에 있다. 만약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을 전적으로 거부하게 되면, 쿠바의 경제 수준은 순식간에 나락하여, 국민들은 궁핍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카스트로의 입장이 관철된다면, 혁명의 목표는 결코 도달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두 가지 사항, 즉 현재 상태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작업 그리고 목표에 대한 열광적 자세는 -주어진 여건 내지는 현실 상황에서는- 동시에 성취될 수 없다. 다음의 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쿠바의 새로운 현실 상황은 정치가로 하여금 양자택일마저 허용하지 않고 있다.
“게바라: (...) 게으름 피우며 빽빽이, 거의 버림받은 채
거의 버림받은 채. 마구 지껄이는 우리의 냉담함,
협동에 관해. 마치 그러한 모순이 나의
목을 졸라대고 있는 것 같아. 어쩌면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을지 몰라,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카스트로: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 (GS. S. 170).
바로 이러한 까닭에 카스트로는 문을 열어젖히며, 사무실 바깥에 있던 아이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극작품에서 아이들은 지식인이 아니라, 쿠바의 일반 민중들을 상징하는 주변 인물들이다. 그러나 혁명적 수단과 혁명적 목표를 동시에 실천할 수 없음을 인식한 게바라는 새로운 무엇을 찾아 나선다. 그는 마침내 “더 많은 월남을!” 하고 부르짖으며, 국제주의적인 투쟁의 길로 향하게 된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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