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3. 갈등과 모순 구조 (1)
브라운은 “사회적 모순의 형성과 해결을 제시하는 일”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간주했다. 이에 비하면 “줄거리는 다만 시적인 표현 방법”에 불과하다. (역주: V. Braun: Über die Bauweise neuer Stücke, in: Es geht nicht einfache Wahrheit, a. a. O., S. 136.) 이미 언급했듯이 작품내의 등장인물 사이의 갈등은 게바라의 죽음 장면으로부터 (쿠바를 떠나기 전 무렵의) 카스트로와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역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막간극을 제외한 일곱 개의 장면은 제각기 주인공의 사고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없는 주변 환경 및 여건 사이의 갈등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주제를 중시할 때, 우리는 극작품의 갈등과 모순 구조로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측면을 제기하고자 한다. 1. 게바라와 산악 경찰 사이의 대립 (제 2장), 2. 게바라와 민중과의 갈등 (제 4장), 3. 게바라와 타냐 사이의 관계 (제 6장), 4. 게바라와 당과의 의견 대립 (제 8장), 5. 게바라와 카스트로와의 견해 차이 (제 10장).
(1) 게바라와 산악 경찰 사이의 대립.
제 2장은 게바라의 체포에서 처형까지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1968년 볼리비아의 계곡에서 부상당한 게바라는 동료 우르바노에 의해서 구출되나, 결국 산악 경찰 프라도에 의해서 체포된다. 그리하여 그는 볼리비아의 민병 대장 젤니쉬에게 넘겨진다.
문제는 게바라와 프라도 사이의 대화이다. 프라도는 게릴라 용병술에 관한 게바라의 책자를 읽고 전투를 배웠다고 비아냥거린다. 말하자면 혁명적 투쟁의 강령이 혁명가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프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에는 마누라와 두 딸이 있지./ 정원도 있고. 나는 휴식을 좋아해./ 평범한 사람이 아닌가? 이곳에서 직접 전투를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전투 영화를 보고 싶어 해.” (GS. 124) (역주: 이 대목은 1977년에 간행된 제 1판에 실려 있지 않으며, 나중에 첨가된 사항이다.) 그러니까 프라도의 견해에 의하면 체 게바라는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방해하고 있으므로,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불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바라가 추구하는 사회 변화의 노력은 프라도에게는 무의미하다고 한다. 그것은 기껏해야 살인과 보복 살인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때 게바라는 프라도를 현상금 5만 달러에 “매수된 돼지”라고 비난하며 (GS. 122),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피 흘리는 세상을 바라볼 뿐이네./ 금방 터지려는 화산 같은 세상,/ 분화구 속을 들여다보네. 분화구속으로 떨어져/ 장렬히 목숨을 버릴 수도 있지.” (GS. 126) 게바라의 이러한 발언은 엠페도클레스의 삶을 유추하게 한다. 사랑과 미움의 이원론적 갈등을 극복하려던 엠페도클레스는 폭정에 대항해서 싸우다가, 끝내 에트나 산에 투신하여 자살한다. (역주: 페터 바이스 Peter Weiss의 횔덜린의 막간극에 등장하는 엠페도클레스는 바로 혁명가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로 묘사되고 있다.) 게바라의 견해에 의하면 거짓된 질서를 위한 억압된 삶보다는 진정한 해방을 위한 자유의 죽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역주: 코젠티노는 게바라의 죽음이 작품 내에서 해방된 삶을 위한 유토피아의 상징하며, 프라도의 삶에 대한 애착이 모순, 강제성 그리고 편협성을 지칭한다고 한다. Siehe Chr. Cosentino: Volker Brauns roter Empedokles: Guevara oder Der Sonnenstaat, in: Monatshefte, Vol. 7, Nr. 1, 1979, S. 41 - 48, Hier S. 44.)
게바라와 산악 경찰 사이의 대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볼리비아에서의 혁명적 전투가 실패로 돌아간 근본적 요인은 게바라가 모든 지지 세력을 상실했다는 데에 기인한다. 이때 미국의 비밀 외교 정책이 실제로 크게 작용하였다. (역주: 카스트로 혁명군은 바티스타 군대의 무전기를 빼앗아, 미군들로 하여금 무기와 식량을 (잘못) 공급하도록 조처했다. 허나 이러한 속임수는 반복되지 않았다. 볼리비아에서의 게릴라에 대항하여 CIA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2의 쿠바 탄생을 저지하려고 했다. C.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 Listen Yankees!"를 참조하라.) 게바라가 말년에 감행한 투쟁이 고작해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느 국가도, 남미에 살고 있는 어느 개인도 “선동자 예수”, 체 게바라의 과업에 직접적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GS. 128).
(2) 게바라와 민중 사이의 갈등
제 4장에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민중들이 게릴라 운동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게바라는 농부 로다스의 오두막에 은신하며, 적의 동태를 살핀다. 그러나 로다스는 가급적이면 피비린내 나는 무력 충돌로부터 벗어나고 싶으며, 게릴라들이 가급적이면 농가를 떠나주기를 은근히 바랄 뿐이다. 이때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볼리비아가 스페인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대부분 농사를 짓는 국민들은 아직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계속 억압자에게 순종하면, 앞으로도 영원히 가난과 무지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비굴한 삶보다는 용감한 투쟁이 필요하다고 게바라는 역설한다. (GS. S. 138). 그가 이렇게 말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즉 게릴라 운동이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은 “아무런 희망 없이 자신을 방어하며/ 목에 밧줄을 묶”고 있다. (역주: 이는 브라운이 극작품을 집필하기 직전에 쓴 시 「IV 게바라」의 한 구절이다. Volker Braun: IV Guevara, in: Text + Kritik, 55 (1977), S. 9 - 11.) 이때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교사는 농부들의 태도를 옹호한다. 교사의 주장에 의하면 농부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침묵만을 지킨다고 한다. 첫째로 농사를 짓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인디언들로서 수백 년 동안 백인들에 의해 기만당했으며, 약탈당했다고 한다. 게릴라들은 주로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근본적으로 인디언들의 권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종적 갈등이 혁명 투쟁을 위한 과업에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둘째, 농부들은 언제나 노예처럼 당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피 흘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눈앞의 순간적인 평화를 선호하고 있다. 농부들은 부 자유와 억압에 순응하며,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려고 할 뿐이다.
그렇기에 게릴라 대원, 엘 메디코는 농부들을 투쟁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처음부터 게바라를 설득하려고 했던 것이다. “초라한 집에 평화를, 숲 속에 전쟁을!” (GS. 135). (역주: 이 구절은 게오르크 뷔히너의 「헤센 급사」에서 기술된 다음과 같은 말이 변형된 것이다. “왕궁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 Krieg den Palästen, Fride den Hütten”.) 이때 게바라는 아무런 희망을 지니지 않고 죽음만을 두려워하는 민중들에 대해 분노한다. 문제는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혁명 투쟁이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데에 있다. 제 7장에서 지적되고 있듯이, 혁명가의 투쟁 대상이 반드시 억압자만은 아니다. 오히려 혁명가는 피억압자의 나약한 정신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GS. S. 153f). 그러므로 게바라는 이미 두 번째 적이나 다름이 없는, 그러한 피억압자의 나약한 정신에 대해 패배를 자초한 셈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억압 구조를 인식하지 못하는 민중들이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운동으로부터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3) 게바라와 타냐 사이의 관계
제 6장은 게바라 자신의 개인적 행복과 사회적 이익 사이의 간극이 다루어지고 있다. 독일 출신의 여성, 타냐는 진압군의 스파이로 가장하여, 게바라를 찾아온다. 사격 솜씨와 외국어 실력을 자랑하는 그미는 게바라 곁에서 머물려고 한다. 쿠바는 타냐에게 더 이상 매혹적인 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동지를 부르짖지 않고, 군주만 부르짖”었던 것이다 (GS. S. 145). 그러나 게바라는 난관을 무릅쓰고 자신을 찾아온 연인을 돌려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타냐는 완강히 반대하며, 자살하겠다고 위협한다. 게바라는 타냐가 함께 볼리비아 진압군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데 동의한다.
문제는 게바라가 타냐를 만날 시점에 “게릴라 전투에 사랑이 용납될 수 없다”고 믿는 데에 있다. 언젠가 그는 “사랑은 혁명가의 감성과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으나, 이른바 전선이 없는 게릴라 전쟁은 그에게 조금도 개인적 행복을 추구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원래 게바라는 세계가 투쟁에 의해서 변화되어야 하고, 혁명가의 세계관이 사랑에 의해서 변모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그는 타냐에 의해서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할까 두려워한다. (역주: Siehe Jay Rosellini: Volker Braun, München 1983, S. 96f.) 말하자면 타인과 사회를 위하려는 자기희생적 노력은 실제 현실에서 타인과 사회를 위하기는커녕, 자신의 안전과 개인적 행복마저 앗아가 버린 셈이다. 상황은 마치 삶과 죽음의 갈림길처럼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게바라는 타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는 육체가 없어. 공기로 이루어져 있지/ 두개골 속에는 오로지 세상에 대한/ 생각만이 잠재하고 있어. 그러니 싸우는 자는/ 금욕주의자이어야 해” (GS. 148).
이로써 브라운이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혁명의 운동은 혁명가로 하여금 세상의 안녕과 타인의 행복을 위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안녕 및 행복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모순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은 혁명과 직결된다.”는 게바라의 근본적 입장은 혁명의 실천 과정에서 “사랑은 배반이다.”라는 구호로 변질되어 버린다. 이러한 원인은 게바라가 이른바 ‘당’이라는 야권 세력에서 일탈되어, 외로운 전투를 전개해야 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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